분개염전| 용호동
분개(盆蓋) 또는 분포(盆浦)는 오늘날 남구 용호동의 옛 지명이었다.
지금은 분포라는 이름만 전할 뿐 염전과 세 군데의 제염 공장에서 해방 후
상당기간 소금을 생산해온 분개 염전은 오늘날 제철회사, 하수처리장, 주택가
등으로 개발되었으며 앞으로 어떤 식의 변화를 거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다.
가. 염전의 역사
"소금은 생활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생필품이며,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생산한 기록이 있다."
소금은 곡물과 더불어 생활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생필품으로 그 역사도 인류 역사와 함께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이
삼국시대로부터 소금을 생산한 기록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관염(官鹽)이 주였으나 사염(私鹽)도 허용하였다. 관염을 제조하는 관영 염분에는 제염 기술자인 염간(鹽干)이
자염(煮鹽)하는 일을 전적으로 주관하고 수군이나 공천(公賤)등이 일을 도왔다. 염간은 염한(鹽漢) 혹은 염정(鹽丁)이라고
불리 웠으며 소금 제조를 자손대대로 신역(身役)으로 부담하여 정액의 염세를 국가에 바치는 정역호(定役戶)였다. 염간의 연간 납세액은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으나 세종 연대에는 대체로 소금10섬 내지 20섬, 성종 연대에는 8섬이었다.
<대한염업조합 중앙연합회 강령>
부산 지방의 염업을 살펴보면 조선전기 15세기에 동래현에는 공염분(貢鹽盆) 23좌, 좌도부산포처치사도군수염분(左道釜山逋處置使道軍須鹽盆) 1좌, 해운포만호도군 수염분(海運蒲萬戶道軍須鹽盆) 1좌가 있고, 속현인 동평현에는 공염분 3좌, 사염분 2좌, 부산포군수염분(釜山蒲軍須鹽盆) 7좌, 다대포군수염분(多大蒲軍須鹽盆) 1좌가 있었다. 이와 같이 선초에 동래현 관내에는 모두 6좌의 염분이 있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8도 염분이 모두 1,362좌이므로 동래현의 65좌는 전체의 4%에 해당된다.
또한 15세기 말에 편찬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는 당시에 동평현 경내에 염분이 설치된 제염지가
현 동쪽의 비오리(非吾里), 현 남쪽의 노리(老里), 전포리, 장림리, 부산포, 장술포의 6개처에 있었다. 당시 8도 전체의 제염지는 265군데 였다. 그리고 19세기 전기에 편찬한 『동래부읍지』에는 염분이 도면에 23좌, 남촌면에 38좌, 부산면 4좌, 사하면 9좌,
도합 74좌로 전기에 비하여 9좌가 증가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용호동염전- 1946년도>
나. 염전의 유래
"약400년전 대연동의 석포부락 동쪽에 소규모의 염전이
그 첫출발이었으며, 사분개라 하였다."
현재의 용호 1,3동에 자리 잡았던 분개 염전은 한일합방 이전 까지만 해도 행정구역상으로는 동래부 남촌면 분포리(東萊府 南村面 盆蒲里)였다. 『경상도지리지』에는 동래현에 25좌, 동평현에 40좌의 소금굽는 가마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래부읍지』역시 동면(지금의 해운대구)에 23좌, 남촌(지금의 남구)에 31좌, 부산(동구)에 4좌, 사하에 7좌의 염분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분개의 유래에 대하여 이곳 고로(古老)는 말하기를 약 4백여년전 대연동의 석포(石逋)부락 동쪽에 소규모의 염전이
개발한 것이 그 첫 출발이었으며, 사분개(四盆逋)라 하였다 (지금의 부경대학교 대연 캠퍼스가 자리 잡고 있는 앞바다의 옛 지명 - 이곳의 넓은 갯벌은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므로 천일제염을 하기에 적당하였음).
그 후 해마다 바다의 자연 매립으로 인해 이 염전은 남쪽 해안인 용호동 쪽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당시 용호동은 인가는 없이 동이(소금을 굽는 가마)만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갯가였다고 한다. 분포 또는 분개라는 지명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분개소금의상표>
조선시대 선조들이 동이를 이용해서 동이(소금을 굽는 가마)로 소금을 부었다고 해서 “분이 있는
포구”라는 뜻으로 ‘분포 또는 분개리’로 명명되다가 주로 ‘분개’로 부르게 된 것이 ‘분개염전’으로
고정된 것이라고 한다.1)
1910년 발간된 조선총독부의 재정통계 연보에 의하면 한일합방 1년 전인 1909년 당시 이곳 분포의 연간 제염량은 44만 4천 2백근으로 집계되어 있다. 분개에는 분(盆)이 24개 있었으며, 한일합방
직전에는 6개만 남았는데, 인부들이 거분, 신분, 강개분, 보리분, 광계분, 동분 등으로 이름을 지어 불렀다.
이 분개의 소금은 천일염(天日鹽)으로 질이 좋기도 유명하며 분개 소금으로 장을 담그면 맛이 매우 좋기로 알려져 있었다.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들에게 의해 전오염 염전이 개발되었는데 사람의
손으로 산을 파내고 흙을 들어낸 후 시멘트 공사로 작업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개발된 염전은 해방이 된 후 한국인들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고 이를 사들인 사람으로는 박두상 씨와
이규정 씨 등을 들 수 있다.2)
다. 염전의 역사
"소금은 제조방식에 따라
천일염, 재제염, 전오염, 암염과 토염이 있다."
소금은 제조방식에 따라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 천일염(天日鹽)을 들 수 있다. 천일염은 바닷물을 끌어넣고 침전시키는 방식으로 수분이 많고 입자가 크다.
배추나 무우를 절일 때 사용하는 소금이 천일염이다. 이는 인천, 주안, 목포 등지에서 많이 생산하였다고 한다.
재제염(再製鹽)은 천일염을 해수나 수돗물에 녹인 후 다시 끓여 증발시켜 만든다. 전기분해를 하기도 한다. 재제염은 수분은
적으나 입자가 곱고 순도가 높다. 요즘 우리가 요리에 사용하는 소금은 거의가 이 재제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전오염(煎熬鹽)이 있다. 이는 밭에서 생산하는 소금이라는 뜻으로 밭에 검은 빛을 띤 모래를 깔아 서실을 만든 다음 둑과 수문을 이용하여 바닷물을 투입한다. 다음에 햇볕에서 바닷물이 증발되고 나면 염분을 머금은 모래를 모아서 그 모래에다 다시 바닷물을 부어서 만들어진 염도가 높은 물을 지하수로 통해 탱크에 저장해 두었다가 주물 솥에 끓여 소금을 생산한다.
전오염은 김해 녹산과 울산 방어진 등지에서 생산하였으며 용호동에서 생산했던 소금도 이에 속한다. 끓일 때 처음에는 장작을 사용하다가 석탄으로 대체되었고 무연탄으로 바뀌어졌다.
이 외에도 인도 호주 등지에서 광산에서 채취하는 암염과 땅에서 채취하는 토염이 있다.
<1955년도 분개염전>
라. 용호동 분개염전과 변화
"전국적으로 품질을 인정받은 용호동 분개염전"
용호동 분개 염전은 전국적으로 그 품질을 인정받아 유명하였다고 한다.
염전은 햇빛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므로 여름에 생산량이 가장 많았다. 그러나 겨울에도 모래를 얇게 깔아 생산량은
적었으나 생산이 중단되지는 않았으므로 사철 일은 있었다고 한다.
염전일은 일급제였으며 하루 삯은 쌀 한 되 반이었다. 그러나 판매가 부진할 때 주로 소금을 품삯 대신 받아 각자 팔아
생활하였다. 이 때문에 용호동은 현금이 가장 많이 유통되었던 곳으로 유명하였다.
현재 생존해 있는 염전 노동자로는 윤유만 할아버지3), 김학만 씨 모친을 포함해 3명밖에 찾아볼 수 없다.
농사를 짓는 것과는 달리 염전은 각자 맡은 일을 따로 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염전에 관계된 노래는 원래 없었다.
이규정 씨가 <국염증산가>를 만들기도 했으나 실제로 불리워지지는 않았다.4)
<1955년도 분개염전>
1962년부터 염전이 택지화하기 시작했다. 1962년에 당시 시장이었던 박영수 씨가 하수처리장을 건립하고 위에 위락시설을
만들어주기로 약속했으나 하수처리장은 분뇨처리장으로 변모되어 용호동민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이 시작 되었다고 한다.
인건비 상승으로 곤란을 겪을 무렵 1965년에 동국제강이 들어오면서 변화는 가속화되었다. 동국제강에 근무하려고 시골에서 상경한 노동자들이 주거할 방이 없자 염전을 매립하여 150세대를 지어 임대를 했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이규정씨 소유의 염전은 현재 삼성시장에서 신일 아파트에 이르는 곳과 하수처리장 영역까지 포함된다.
용호동은 염전과 어촌, 농촌이 결합된 마을이었다. 1997년 인구는 약10만명 정도이나 이 중 진정한 본동 인구는 2천명정도라고 한다. 용호동은 하수처리장 문제로 주민과 정부의 대립이 심각했다. 1992년도에 하수처리장 확장공사가 확정되었다.
관에서는 지역이기주의라며 용호동 주민을 비난했고 주민들은 지역 환경보호 차원에서 관을 비난했다. 이에 시에서는 13개
조항을 내걸고 주민 유화에 힘쓰는 한편 1992년 공권력을 투입하여 하수처리장 확장 설치 공사가 착공되었다.
시에서 약속한 내용 중 중요한 항목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마을회관 설립
둘째, 하수처리장 상부 만이천평 슬라브 위에 체육공원 설치
셋째, 이기대 진입로 확장
네째, 백운포에서 천주교 묘지에 이르는 도로 개설
다섯째, 동명불원 앞 도로 확장
체육공원 설치시 운영권 및 매점 등 부대시설 운영권을 주민에게 우선적으로 배당하여 복지금을 마련하도록 해주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또한 개장 1년 전에 주민에게 운영권을 넘겨주기로 했으나 실제로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주민들의 원성을
샀다.
이 하수처리장은 1991년 12월(용호하수처리장 증설 사업 착공)부터 1997년 10월에 걸쳐 남구 용호3동 30번지에 건설되어 2001년 현재 부산광역시 남부하수처리관리소(용호하수처리장 : 1975 ~ 1981년 건설, 1980년 5월 개소, 1981년 12월 정상 가동, 1992년 11월 명칭변경) 로서 부산진구, 남구, 수영구에서 배출되는 생활오수의 정화 업무처리(처리방식 : 활성 오니법 + 혐기성 소화법)를 하고 있다. 부지면적은 3만 5천 평이며 처리 용량은 1일 최대34만㎥ 이다. 1997년 4월 처리장 위에는 12,000평의
상부체육공원이 개장되어 축구장, 테니스장, 다목적광장 등이 조성되어 주민들의 체력증진 및 휴식공간으로 제공하고 있다.
고사성어의 상전벽해(桑田碧海)라는 말이 이곳 분개 염전의 변화에 맞는 것 같다.
이제 용호동에서 염전의 흔적을 찾아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분포맨션이란 이름의 아파트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1) 당시 염전일을 했던 윤유만 할아버지(2001년 현재 81세)가 입증한 내용이다.2) 이규정 씨와 1997년 현재 유림탕을 운영하고 있는 김지관씨의 외조부인 박두상 씨가 일본인이 하던 염전을 인수하여 경영하였다. 이는 이규정 씨의 차남인 이종철 씨가 증언한 내용이다.
3) 윤유만 할아버지는 부친이 염전 공자의 감독관이었으며 본인은 16세까지 학교를 다니며 오후에 염전일을 거들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12년 거주한 후 27세때 귀국, 염전일을 했다고 한다. 현재 생존해 있는 염전관계자 3명 중의 한명이다.
4) 이규정 씨의 차남인 이종철 씨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 중에<국염증산가>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노래의 가사는 부록에 실었다. 이종철 씨에 따르면 부친 이규정 씨가 이 노래를 보급할려고 노력했다고 하나 윤유만 할아버지는 이 노래를 부른 적이 없다고 증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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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