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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제강| 용호동

동국제강 이미지

철강산업은 건설, 조선, 기계, 자동차, 가전, SOC부문 등 국가산업 전반에 걸쳐 기초소재를 공급하는 중요한 산업이다. 그러나 한국의 철강산업 역사는 불과 50여 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철강기업들은 이제 세계적인 철강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여기 분개에 소재하였던 동국제강은 60년대 황무지와 같던 부산에 중공업의 핵심산업인 철강공장을 건설하여 지역경제에 활력소를 제공하면서 성장한 기업이다. 포항종합제철1)이 세계 제일의 종합제철 메카라면 동국제강은 세계적인 전기로(爐)2) 메카이다.


1)후판(厚板)의 원재료로 사용되는 슬래브는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포항제철에서만 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부족한 분량을 멕시코와 브라질, 동유럽 등에서 수입하고 있다. 

2)형강은 건설현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 형강공장 특히, 제강 공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작업인 쇳물을 생산하는 전기이다. 


동국제강 사람들은 유난히 부산을 사랑한다. 

그 이유는 부산 용호동 동국제강은 철강산업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동국제강은 1963년에 민간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대규모 현대적인 철강공장을 부산 남구 용호동(일명 분개 일대) 갯벌 22만평 부지에 건설하였고, 이 용호동 공장에서 국내 최초로 1965년 5월 용광로 설치 및 가동, 대한민국 최초로 전기로 제강법을 도입하여 1966년 10월 국내 최초의 15ton 전기로 제강공장을 설치 및 가동, 1971년 2월 후판3) 압연공장을 준공하여 국내에서 처음으로 첫 중후판 제품 생산 등 계속적인 설비투자를 증대하면서 철강보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혼신의 노력을 하며 세계굴지의 철강기업으로 성장하여 왔다. 


3)후판(厚板)은 선박 만드는 데 사용되는 철판 


그러나 용호동의 공장부지가 일반주거지로 용도변경이 되면서 각종 설비의 신·증설이 불가능하게 되어 동국제강의 모태였던 용호동 공장은 마침내 1998년 12월 폐쇄하게 되었고, 1998년 3월 포항에 26만평의 새로운 부지 위에 봉강 공장을 준공하여 제2의 창업을 선언하면서 1999년 주력생산기지를 부산에서 포항으로 이전하였다. 용호동에서 동국제강은 비록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나 대한민국 철강사에 굵직한 기록을 남겼을 뿐 아니라, 철강 전문 기업으로서 큰 발자국을 남기게 되었다. 


철을 통해 문화발전에 기여한다. 

동국제강의 역사는 1954년 7월 7일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 4가 91번지에서 한국특수제강(주)을 인수하여 못을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동국제강은 1954년 창업자 장경호(‘75년 작고) 회장이 '철강보국의 실천'이라는 창업이념과 '세계 제일의 철강기업'을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40명의 직원과 함께 출발하였다. 1954년 8월 20일 드디어 동국제강 최초의 철강제품(못)을 만드는 제강공장을 가동하면서 철강보국을 향한 철강산업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비록 적은 규모이지만 못과 선재의 엄청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중간소재인 와이어 롯드(Wire Rod)를 국내 최초로 공급했다. 당시 원 재료인 철선은 한국전쟁 후 고철을 용광로나 주강용에서 강편으로 재생 시킨 것으로 와이어 롯드를 생산, 이를 다시 제강·선재·철근제품으로 생산 공급했다. 1959년 처음으로 신선(伸線)4) 제품을 생산하였고, 1961년 2월 8일 철조망 철선공장을 신설 운영하기 시작했다. 동국제강이 지금까지 주력 생산하고 있는 건설용 기초소재인 철근이 이 해부터 생산되었다. 


4)신선(伸線)은 강선(鋼線)·철선(鐵線)을 만들때 다이의 구멍을 통해 뽑아내어 목적하는 모양과 치수의 선을 만드는 가공법이다. 


소재(素材)로는 적당한 굵기의 봉재(棒材)를 목적하는 선의 단면 모양에 맞추어 구멍을 뚫은 다이를 통해 이 봉재를 뽑아냄으로써 굵기를 줄이며, 이 조작을 되풀이해서 점점 가는 선으로 만든다. 1963년은 동국제강이 대규모 철강 전문기업으로 발돋움하는 역사적인 해였다. 1월 18일 경영진(장경호 사장과 장상준 부사장 일행)은 대규모 철강기업을 건설하기 위한 부지 물색을 하던 중 부산시 남구 용호만(용호만 177번지 일대)을 답사하고(당시는 분개소금으로 유명했던 남천만 소금 갯벌이었다) 공장을 건립키로 최종 확정했다. 

1963년 5월 18일 오전 12시, 대망의 부산 용호동 공장 건설을 위한 기공식을 갖고 정지공사에 착수하여 용호동 시대, 나아가 동국제강 기업사의 한 획을 그었다. 

당시 부산 용호동 공장 건설은 일면매립, 일면건설, 일면생산 이라는 촌각을 다투는 사업이었다. 1964년에 국내 최초 용광로인 큐플라기기를 설치하였고, 1965년에 50톤 고로5)를 준공시켜 한국최초의 용광로 시대를 개막시켰으며, 아연도 강판공장을 준공 가동하여 베트남에 수출하는 등 활발한 기업활동이 시작되었다. 1966년에는 철광석과 연료가 빈곤한 한국의 자원사정을 감안, 국내 최초로 전기로6)를 설치하여 일반강 시대를 열게 되었으며, 1968년 부산공장에서 생산하는 제품이 KS표시품 허가를 받아 품질개선에도 주력했다. 1969년에는 Rod공장 준공을 비롯 154KAV 규모의 변전소 설치공사를 착공했다. 내화공장 소성로 2기가 증설 (60톤/cb)되는 한편, 후판 생산을 위한 주요 설비의 입하가 시작되었고 이때부터 선박·SOC부문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판재류 생산을 기획하였다.


5)고로는 용광로의 다른 말이며 발열원으로서 무엇을 사용하느냐에 따랄 코크스 선고로·목탄선(木炭銑 고로·전기선고로 등으로 나누며, 생산되는 선철의 대부분은 코크스선고로에서 생산된다. 

6)전기로는 고철을 넣어 쇳물을 끓이는 그릇이다.


철강전문기업으로 자리매김 

1971년 2월에는 부산제강소 후판 압연공장에서 국내 최초 중후판제품을 생산함으로써 건설 기초소재만 생산하던 것에서 벗어나 조선 및 철 구조물 등의 원자재도 생산하게 되었다. 1972년 한국강업(인천 소재)을 인수하여 인천공장 준공 등 계속적인 사세확장으로 동국제강은 부산, 인천을 거점으로 한 서울공장, 인천공장, 부산제강소 등 3개의 공장을 운영하여 생산품의 공급지역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면서 명실공히 철강 전문기업으로서 확고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특히 부산에서의 후판생산은 이 분야의 독보적인 생산기업으로 뿌리를 내렸는데 공장별 생산량을 살펴보면 제강부분은 부산 24만 톤·인천 1만2천 톤, 압연부문은 부산 26만 톤·인천 1만6백 톤, 신선부문은 서울공장 1만5천톤을 생산하였다. 


동국제강만의 특이한 노사문화인 “합의문화” 

동국제강에는 독특한 기업 문화로서 ‘합의문화’가 존재하고 있다. 노(勞)와 사(使)가 따로 없이 구성원 모두가 주인의식으로 똘똘 뭉친다는 감나무 정신이다. 경영자는 감나무의 줄기가 되고 사원은 풍성한 가지가 되어 탐스러운 열매를 얻으려는 노력, 이것이 바로 동국제강의 노사문화이며, 동국제강만의 특유한 기업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동국제강은 노사가 권리와 의무를 함께 지고 있다고 한다. 회사는 경영정보를 소상히 열람하고, 노조는 회사의 어려움을 경청하면서 공동경영의식으로 품질향상에 노력하는데 1991년에는 ‘신노사문화’의 모델로서 노사공동선언문을 발표하였다. 1990년대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노사간 첨예한 노사대립을 벌였던 시기였으나 1994년 2월 15일 동국제강 노조는 국내 최초로 ‘항구적 무파업’ 선언(‘94), 국내 최초 ’무교섭 임금타결‘(’95년)를 합의하였다. 동국제강 노조가 선언한 ‘항구적 무파업’과 부산제강소에서 노사세계화 선언 결의대회를 갖고 국내 최초 ‘무교섭 임금 타결’은 새로운 노사문화를 정착시키게 한 충격적인 일이었으며, 국내 산업계 노사문화를 선도하는 등 그 반향이 매우 컸다. 


동국제강의 합의문화가 정착될 수 있었던 것은 창업 당시부터 지속된 가족적인 회사, 전문가정신,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내일을 창조하려는 미래지향적인 삶을 위한 기업가치를 구성원 모두가 공유한데서 비롯된다고 한다. 1975년 7월 창업자 장경호(‘75년 9월 작고) 회장은 ’기업의 성장에는 그 만큼 사회적 책임이 따라야 한다‘고 하면서 사재 33억 원(現약2천억원 규모)을 사회에 환원, 무소유를 실천한 올곧은 기업인으로서의 모범을 보였다. 이 財源으로 불교진흥원이 설립됐으며, 현재의 불교방송이 발족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2대 경영주인 장상태(2000년 4월작고) 회장은 98년 그룹의 모태인 부산공장을 폐쇄하면서 1백억원을 출원, 대원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장학사업, 아동복지사업, 생활보호대상자들에게 장학금과 생활보조금 등을 지원 하고 있다. 장 회장은 ‘토지는 개인의 재산이 될 수 없다’ 는 신조에 따라 부동산 투자를 하지 않은 경영인으로 알려져 있다. 

1996년에는 창업 이래 최대 투자인 1조원 이상을 투입하여 포항지역의 26만 평부지 위에 최첨단의 포항제강소를 건설하였다. 용호동 공장부지가 일반주거지로 용도변경이 되면서 연간 140톤 규모의 철강생산능력을 자랑하던 부산제강소는 각종 설비의 신·증설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1998년 12월 그 동안 동국제강의 모태였던 부산 남구 용호동 22만 여 평의 부산제강소는 ‘부산제강소 감사제’와 함께 마지막으로 제강공장과 압연공장의 가동을 전면 중단하면서 폐쇄하여야만 하는 운명을 맞이하였다. 1998년 3월 포항에 26만평의 새로운 부지 위에 봉강 공장을 준공하여 제2의 창업을 선언하였다. “기업은 고객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기업신조에 따라 부산을 비롯한 인근 지역 고객의 요구를 간과할 수 없는 동국제강은 1998년 12월 용호동 공장을 폐쇄하면서 대신 ‘영성제강’을 인수, 1999년 1월 19일 부산제강소를 새롭게 가동하였다. 

부산시 신평동에 규모는 작지만 제2의 부산공장을 가동하면서 ‘철강보국’의 창업정신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용호동의 신화를 간직한 많은 인력이 포항제강소로 옮겨갔지만 40년 넘은 백전노장의 철강장인들이 사업장을 지키는 핵심 인력은 여전히 부산을 지키고 있다. 2001년 현재, 동국제강은 부산 남구 용호동 분개에서 시작된 철강산업의 신화를 지키며 연간 5백5만 톤의 각종 철강제품을 생산 공급하는 전기로 메이커로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철강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제 분개지역에서 동국제강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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