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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농장| 용호동

용호농장 이미지

용호 2동의 오륙도 근방에 자리 잡은 용호농장은 한센씨병을 가진 사람들의 정착지였다. 현재 용호농원에 거주하고 있는 한센씨 가족은 몇 안 되지만, 그들이 이곳으로 이주와 정착까지의 우여곡절은 분명 인간들의 이기심과 세상의 편견이 만들어낸 소외와 한(恨)의 역사라 할 수 있다.

1909년 감만동(戡灣洞) 한센병원에서 시작하여 일제시대, 해방, 미군정, 군사독재,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우리 현대사의 구석진 곳에서 그들은 최소한의 생존 터전을 자리잡고 일구기 위해 각고의 노력은 물론 온갖 고통까지 견뎌내야 했다. 


초창기 선교사들의 관심으로 이들은 1911년부터 상애원(相愛園) 한센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재활의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일본 군국주의의 득세로 내외적 신앙 성장과 의료 사업에 많은 압력과 장애가 다가왔다. 이같은 걸림돌이 있긴 했지만, 기독교적 구원과 인간애로 상애원은 점점 사랑의 동산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40년대에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일제는 당시 군용지였던 용호동 산2번지 부근인 감만동 상애원에는 외국인, 특히 적국(敵國)인 미국, 영국, 호주 등의 사업기관은 둘 수 없다고 하여 한센 환자들을 돌보던 선교사들이 쫓겨나게 되었다. 


당시 총독부에서는 1940년 12월말까지 자진 이전이 불가능하면 소록도로 강제 이송하겠다는 엄명까지 내렸다. 그러나 감만동 상애원은 이전할 수 없는 형편이었고 결국 총독부에 의한 강제 철거가 눈앞에 이르자, 그해 10월부터 그들은 각자의 길을 떠나게 되었고 그래도 갈 곳 없는 사람들은 12월 소록도로 강제 이송되고 만다. 당시 600여 명 가운데 200여 명은 스스로 길을 찾아 떠났고, 일제의 두 차례에 걸친 강제 이송에도 불구하고 감만동 상애원을 그대로 지키던 사람도 있었으나, 일제의 끈질긴 압력에 이듬해인 1941년 3월에 소록도로 떠나게 되어 여기서 감만동 시절을 마감하게 된다. 


1945년 9월경 한센 식구 몇몇이 재회한 장소는 감천동(甘川洞)이었다. 과거 상애원 식구들이 감천동에서 재활의 삶을 시작했다는 소식이 경남 일대에 전해지자 흩어졌던 이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그러나 감천동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아 더 이상 생활할 수 없었다. 물론 가장 큰벽은 주민들의 반대였다. 그때, 경남 노회 사회부 주선으로 1945년 10월 15일 영도 동삼동(현 태종대)에 이른바 ‘박애원 교회’ 이름으로 교회를 재건했는데, 당시 동삼동은 미군이 관할하였기 때문에 미국 선교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270여명의 한센 식구들이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힘들긴 마찬가지였다. 의류, 주거문제, 특히 지역적 특성으로 인한 식량의 운송문제 등 제반 여건들이 좋지 못했으며, 또한 갑자기 닥쳐온 장티푸스로 인해 70명에서 100명 가까이 사망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그렇게 6개월가량이 지나갔을 때, 드디어 이들에게는 꿈에도 그리던 오롯한 정착지가 주어졌으니 이곳이 바로 현재의 용호농장이었던 것이다. 


미국의 윌슨 박사(당시 여수 애양 병원장)와 상애원 대표 및 사람의 수차례에 걸친 답사 끝에 용호동산을 새 정착지로 결정하고, 당시 군사 작전 지역이었던 이곳을 허락 받고 1946년 3월부터 그해 7월까지 용호동 주민의 반발을 다소나마 줄이기 위해 시차(時差)를 두면서 배편으로 약270여 명이 이주하였다. 감만동 한센병원에 수용 중이던 환자들을 소록도로 강제 이주시키자 함께 가기를 반대하는 그 가족들을 윤창수 원장이 주동이 되어 20여명의 연명으로 정부에 호소하여 허락을 받아내고 그곳에 이주해서 정착하게 된 것 이다. 그 당시 이주한 사람의 수는 270여명이었다. 

양성봉 씨가 이곳의 관리자로서 경상남도 도지사로 있을 때에, 한센씨병 환자의 이주를 둘러싸고 용호동 본동사람들과 분란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용호동 동민들이 모르게 밤에 바다를 통하여 갑자기 들어오게 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 뒤 용호동 본동 사람들과는 마찰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당시에 이곳에 있던 치안대를 돌려보내고 국립 나환자수용소를 만들어 이들을 수용하였다. 그 중에서 양성환자들은 소록도 병원으로 보내지고 음성환자들만 남아 자활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이들이 농장을 경영하면서 닭과 돼지를 기르게 된 것이다. 지금은 음성환자마저도 없다고 한다. 


이곳의 지리적 특성은 북(北)편으로는 장봉산이 북풍의 찬바람을 막아주고, 그 기슭 사이로 옥천이 굽이굽이 흐르고 있으며 남(南)으로는 드넓게 펼쳐진 태평양 바다 위에 오묘한 조화로 오륙도가 보인다. 사람이 생활하기에는 천혜의 요지라고 해도 좋을 만큼이다. 이곳에는 일제 시대에 일본이 자국 방어를 위한 방어 요충지로 포진지를 구축하였다. 현재는 11개 굴 중 6개만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해안에 설치된 포진지는 국제규약을 위배하여 만든 1기의 420㎜ 포를 설치하였으나 전쟁의 패배로 실제 사용을 하지 못하고 미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병을 전염성이나 유전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확신하며 결핵을 가장 두려워하여 한때 결핵 환자는 격리시켜 생활한 적이 있다고 한다. 굿을 비롯한 민속 행사는 없으며 4월 10일을 개원 기념일로 잡아 씨름, 축구, 마라톤, 학생운동회 등이 열리고 있다. 


이곳은 주로 채소, 계란 등을 생산하고 있으며 돼지를 다량 기르고 있으나, 거의 떠나버렸으며 2001년 현재 22명만 남아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2세에는 한센씨병을 앓는 사람이 거의 없어질 것이며, 현재 1세 만으로 끝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다. 그들은 또한 자신의 삶의 흔적도 역사의 뒷켠으로 아예 잊혀졌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을 갖고 있다. 대담자인 용호농장 지역 교회의 박창용 장로에 의하면 2세가 한센씨병을 앓는 사람이 없으므로, 현재 환자 1세 만으로 한센씨병 환자의 여러 가지 애환은 끝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처음부터 살아왔던 이주자 270명중 현재 15명만 살고 있으며 그 이후에 들어온 분들을 합쳐 영주권을 가진 분들은 762명이다. 지금은 옛날 용호농장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며 용호동 오륙도 SK-view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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