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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대| 용호동

이기대 이미지

이기대는 장산봉이 바다로 면한 동쪽의 바닷가에 있는 대(臺)로 용호 3동에 속한다. 현재 용호 하수처리장에서 고개 하나 넘은 곳에 있다.

장산봉(225.3m)이 바다로 면한 동쪽은 기암괴석의 바위와 수목 그리고 바다와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자아내는 곳이지만 험한 지역이어서 사람들이 왕래하기에는 위험하다. 그래서 바다에서 배를 타고 그 경관을 즐긴다. 그러나 이기대 자리는 직각으로 된 절벽이 아니라 바다에 접한 암반이 비스듬한 경사로 기울어져 바다로 빠져드는 자리이다. 이 비스듬한 경사로 기울어져 바다로 빠져드는 자리이다. 그 자리는 거의 평면에 가깝다. 그렇게 반석이 기울어져 평면에 가깝게 된 곳이 산을 따라 2㎞정도 바닷가로 이어져 있다. 

그 반석에서 동해를 바라보는 경관과 밀려드는 파도를 바라보는 경관이 빼어날 뿐 아니라 낚시꾼의 낚시터로 아주 좋은 곳이다. 이 곳은 한국동란 이후 군의 작전지구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1993년부터 민간인에게도 개방되었다. 


이기대라는 이름은 『동래영지(東萊營地)』에 나타난다. 이 책은 좌수영의 역사와 지리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곳 좌수사로 있던 이형하(李亨夏 : 1849. 12.30 ~1850. 8. 21 재임)가 종전의 기록을 보고 보충 수집한 책이다. 이 책의 산천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이기대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좌수영에서 남쪽으로 15리에 있는 곳으로 위에 두기생의 무덤이 있어서 그리 말한다고 되어 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씌어 있지 않다. 또한 경상좌수사가 두 기생을 데리고 놀아서 이기대라 했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경상좌수사가 두 기생을 데리고 놀았다는 이유만으로 이름이 이기대가 될 수는 없다. 지난날 대부분의 벼슬아치들은 가는 곳마다 기생놀이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천민에 속했던 두 기생의 무덤이 있다고 경관이 빼어난 곳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만약, 기생의 무덤으로 이기대가 되었다면 그 기생은 여느 기생과는 다른 특징적인 기생이거나 특정한 일을 한 기생의 무덤일 것이다. 이기대라는 이름에 관해서는 여러 이론이 많다. 국어학자 박지홍은 부산일보(1993. 7. 22)에 수영의 향토사학자 최한복(崔漢福 : 1895 ~1968) 씨의 의견에 동의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수영성을 함락시키고는 부근의 경치 좋은 곳을 가려 축하잔치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때 수영의 의로운 기녀가 자청해서 그 잔치에 참가하여 왜장에게 술을 잔뜩 권하고는 술에 취한 왜장을 안고 물 속에 떨어져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기대(義妓臺)가 맞는 이름이라 했다. 


이기대라는 이름은 공부(公簿)라고 할 수 있는 『동래영지』가 이미 145년 전에 종전의 기록을 자료로 해서 이기대라하고 있으니 그에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기대의 유래는 박지홍의 말 그대로 임진왜란 때의 의로운 기생에 연유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때의 기생은 둘이었고, 그렇게 순사(殉死)한 기생을 이기대 위에 묻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이기대가 좌영남십오리(左營南十五里) 상유(上有) 이기총운(二妓塚云)으로 기록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민간인을 통해 전하여 내려왔을 이기대의 명칭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기대 해안의 절벽에는 지나가는 배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듯 바다를 바라보고 서있는 돌부처상의 바위(농바위)가 있다. 요즘은 이기대가 해파랑길의 출발지로서 갈맷길중 가장 아름다운 길로 주목받고 있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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