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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포진지| 용호동

19세기 말부터 20세기의 초 세계 제국주의의 열강들이 앞다투어 후진국 및 약소국들을 지배하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강제이용 및 속국화 시키는 시대에 일본은 동해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대파하여 1905년 러·일전쟁1)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후 일본은 본토 공격의 위협을 느껴 공해상의 길목을 지킬 필요성을 느끼고 부산 용호동 오륙도 해안에 영화에 나오는 나바론 요새와 같은 거대한 규모의 포진지를 구축하였다고 한다. 일본은 천혜의 이기대 해안을 절개하여 거대한 지하 포진지를 16년에 걸친 공사 끝에 완성하였다. 문의 크기가 3.5×4㎡되는 출입구를 2개 만들고 안쪽으로 원형의 터널공법으로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였다. 전중희(1931년 생) 씨에 의하면 먼저 해안의 산자락을 깍아서 평평하게 만든 후 땅 위에 콘크리트 거푸집을 만들어 1·2차에 걸쳐 2중으로 철근 콘크리트를 붓고 양생시켜 만들었는데 중간에 골탕처리가 된 삼베를 여러 겹 입혀서 방수 방습 시설을 철저히 하였다. 콘크리트 거푸집의 두께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모든 시설을 갖춘 후 그 위에 흙으로 예전과 같은 산은 다시 만들고 주변과 같은 소나무를 심어 포진지를 위장하였다고 한다. 해방 당시 소나무가 울창해서 하늘에서 보아도 이 포진지를 전혀 식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원식 씨에 의하면 마을 어른신 중에 “일본이 포진지를 비밀리에 구축하기 위해 한국인들을 일본으로 밀항시켜준다고 배에 태운 후 바다를 맴돌다가 한 밤중에 내려 놓고 일본에 도착하였다고 하면서 일을 시켰는데 포대공사가 끝나고 풀려 나와보니 일본이 아니라 부산 땅이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고 하였다. 박창용 장로는 일제 때 이러한 진지를 구축한 굴이 6개가 있었는데 해방 후 폭파되거나 매몰되어 현재 쌍굴 4개가 남아있다고 한다. 김진석 옹은 1934년에서 1938년까지 일했고 다시 1941년부터 해방 때까지 일했다고 한다.2)처음 구경 15㎝의 대포가 장착된 포진지에서 포를 옮기고 앉히는 작업을 했는데, 일본에서 싣고 온 포를 기중기나 나무 침목을 이용하여 옮겼으며 동력은 석탄을 때는 증기기관이었다고 한다. 구경 41㎝포는 2문, 구경 15㎝포는 4문, 구경 7㎝야포가 2문 있었으며, 구경 41㎝포는 포신의 길이가 20m(윤랑근 씨는 20m, 정진석 씨는 15m 정도<요즘의 전화 전신주 길이> 전중희씨는 10m정도로 추정함.) 정도로 길어서 한번 포를 쏘면 대마도 앞바다까지 날아간다고 하였다. 41㎝포는 포면내부를 청소하기 위해 사람이 포신 안으로 들어갔으며 포탄도 탄두부의 무게만 해도 1ton 정도여서, 트럭에 포탄 1~2개 밖에 못 실었다고 한다. 일본은 군함용으로 41㎝포를 제작하였으나 국제법 규정위반으로 설치할 수가 없어서 한국의 이곳 육상에 설치하였다고 한다. 포진지 내부를 살펴보면 굴속에서 중유를 이용한 발전기를 여러 대를 가동하여 쟈키로 물을 끌어 올리듯이 수압을 조정하였는데 100ton 규모의 콘크리트로 만든 수압 조정추를 이용하여 포탄을 장전하고 포신의 방향을 조정하였다. 천정은 이동식 도르레 장치를 설치했으며 바닥은 콘크리트틀 치고 그 위에 철도 레일을 깔았다고 한다. 1) 러·일전쟁은 일본이 1904년 2월 8일 한국과 만주 분할을 둘러싸고 일으킨 전쟁으로 러시아의 뤼순 군항 ( 順軍港)을 기습 공격하여 시작되어 1905년 9월5일에 일본의 승리로 강화한 전쟁이다. 이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었으며, 러시아는 전쟁패배 후 혁명운동이 진행되었고 일본은 강대국들부터 한국지배권과 민주진출을 확정 받은 전쟁이다. 2) 김진석 옹은 당시 17세때 고무공장에서 1일 25전의 임금을 받았는데 1일 55전을 받는다하여 일반 노무자로 일을 하였으며 조선인 노무자가 150여 명이었다고 한다. 포는 진지 내에 세 종류 모두 있었는데 탄약고는 2개가 있었다. 탄약고 작업시 사하구 엄궁동의 발파공이 많이 와서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탄약고는 말굽 모양의 쌍굴로서 폭 4m, 높이 7m 정도의 길이 있으며 바닥은 콘크리트를 치고 그 위에 철도 레일을 깔았고 차량이 통행하였다고 한다. 굴 안쪽 화약고는 바닥크기 100m×20m 정도였는데 습기가 차지 않도록 하기 위해 콘크리트를 한 후 1m를 뛰우고 35㎝ 두께의 콘크리트 옹벽을 쳐서 탄약고에 통풍이 잘 되도록 만들었다. 이중 콘크리트에는 삼베에 골탕을 묻힌 것을 몇 겹으로 붙이고 마지막으로 동판을 입혀서 만전을 기하였다고 한다. 1차 만든 탄약고의 규모는 길이 100m, 폭 50m, 높이 10m정도였으나 습기 방지를 위하여 통풍구 공간을 두고 2차 공사를 하였기 때문에 완성된 탄약고는 길이 90m, 폭 20m, 높이 7m로 작아졌다고 한다. 탄약고로 사용하는 굴이기 때문에 항상 습도계를 비치해 두고 있었으며 1년에 1회 48시간동안 통풍하여 건조를 했다고 한다. 먼저 한쪽 통풍구에는 따뜻한 바람을 불어넣어 다른 쪽 통풍구로 바람이 빠져나가게 하였고 탄약고의 문은 압착식(헤치형태)으로 만들어서 핸들을 돌려 문을 잠그고 나면 외부의 공기가 전혀 들어갈 수 없도록 완벽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탄약고 안에 습기가 절대로 차지 않도록 하였다고 한다. 현재 탄약고 한개는 문서 보관소로 쓰고 나머지는 방치되어 있는데 윤랑근 씨는 사람들이 탄약고의 동판을 떼어 팔기 위해 굴착기로 파고 폭약을 넣어 폭파시키는 등 벌집처럼 만들었다고 한다. 해방 후 미군은 지상에 있는 포를 폭파시켰다. 정진석 씨에 의하면 당시 파괴된 포신을 보았는데 포신 중간이 동강이 나서 잔해가 많이 나뒹굴었는데, 포신을 그냥 무쇠 덩어리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포신 안쪽은 무쇠로 되어 있으며 그 위에 여러 겹의 강철을 감겨 있었고 바깥 부분은 연철이 입혀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포탄을 쏘고 나서 충격에 견딜 수 있게 하기 위해 그렇게 만든 것 같다고 하였다. 박창용 장로는 포신의 강철은 시계의 태엽처럼 납작하게 되어 있었는데 강철 잔해를 갈아서 칼을 만들어 쓰기도 했다고 한다. 포진지 중의 하나는 정태춘씨가 5년 전부터 젓갈공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현재 포진지 안에는 해방 이 후 주민들이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지하 굴에 있는데 철근을 떼어가기 위한 수많은 폭파의 흔적들이 있으며 콘크리트를 뜯어내고 철근을 뽑아간 자국들이 도처에 있었다. 굴 안에 기둥들도 파괴된 채 동강난 철근자국들만 천장에 박혀 있었다. 해방과 6.25를 겪으면서 방치되어 있던 포진지를 살기 어려웠던 사람들이 철근들을 떼어내어 고철로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바깥의 진지 위로 올라가 보니 밭이 있는 곳에 아직도 공기 정화용으로 보이는 4개의 콘크리트 구조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포를 설치했던 자리는 이미 매립되어진 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박창용 장로는 진지의 위치를 가리키면서 땅을 파면 그 당시 진지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다. 또 포를 쏘기 위한 관측소가 진지 위쪽 중턱에 있었으며 진지 포를 위장하기 위해 주변의 소나무가 휘어 잡혀 있었다고 했다. 전중희 씨는 마을사람들이 미군이 포진지를 접수 하였을 때 경비가 허술한 밤중에 진지로 몰래 들어가서 신주로 만든 장약 보관 통을 훔쳐서 관측소 아래 산쪽 으로 도망하였다고 한다.3) 포진지 출입구 앞쪽에는 그 당시 사용하였던 화장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것을 허물어 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힘깨나 쓰는 분들이 2일간 해머로 두드려도 끄떡도 하지 않아 그대로 방치해 두고 있다고 한다. 전중희 씨는 8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 있을 정도로 견고한데 우리나라 아파트들은 지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 금이 가는 등 문제가 되는 것은 각성해야하며 악랄한 일본인들이었지만 배워야 할 점이라고 말하였다. 박창용 장로는 기와집들 중에서 밑에 있는 집이 당시 포진지의 자가 발전기가 설치되어 있던 집이라고 했다. 용호동 입구 부근에는 그 당시 일본인들이 사용하였던 집이 남아 있었고, 또 길 옆에는 좁은 하수구 관로도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진석 씨에 의하면 41㎝ 포관리(기름치고 딱는 등)는 조선인 군속 3명이 전속으로 담당하였다. 다른 지역에 있는 포진지의 관리를 위해 보통 3~4일에서 때로는 7일정도 출장도 다녔는데 당시 가덕도 진지에 28㎝ 유당포(곡사포)가 있었고, 다대포 앞 목도 진지에는 고사포 2문, 거제도 지심도에도 고사포 2문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었던 포진지 이야기가 10년 전에 국제신문을 통해 일본군의 한반도 침략거점의 산물인 거대한 포진지가 있었다는 사실이 열람되었으며, 그 후 2000년에 KBS방송, 남구신문 등에 연이어 역사적 사실로 알려지게 되었다. 3) 전중희씨에 의하면 장약 보관통은 무게가 약20관정도, 덮개무게만 해도 2관정도로 힘이 센 장사가 2개를 지고 나오기도 하였다고 한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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