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역소| 용당동
1882년 6월의 재조선국 일본인 민통상장정(在朝鮮國 日本人 民通商章程)을 기점으로 1883년 10월 3일에 부산 해관(현재의 세관을 말함)이 개설되었다. 이 때 세관의 설비와 함께 1906년 7월경에 부산 항구의 신선대에 해안가에 검역소와 이에 속한 제 설비가 갖추어졌다. 이 공사는 1910년경에 준공되었는데 검역소의 본관인 3층의 목조건물은 1907년 7월에 착공하여 1908년 3월에 준공됐으며, 1912년 이전에 건축된 부산의 주요 목조건물 연표에 올라 있는 걸작이다. 처음 검역소가 이곳에 설치되었을 때 용당 사람들은 아편 중독자나 행려병자를 수용 치료하는 병원인 줄로 알았다. 화장장은 검역소 사망자 이외에도 전관 거류지의 일본인이 전염병으로 죽으면 이 곳에서 화장했다. 화장터는 해방 후 7,8년간 계속 있었으나 용당 사람들은 화장을 하지 않고 공동묘지를 이용했다. 태평양전쟁이 치열했던 1943년 3월 이후 징병과 징용이 실시되면서 검역소는 수출입 화물의 검역 대신 조선의 청장년들의 신체 검사소가 되었다. 전세가 일본에 불리해지면서 1944년부터 매일 혹은 며칠마다 흰색 선체에 붉은 색 십자 표시를 한 대형 병원선이 왕래했다. 이 병원선에는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 온 조선인들이 타고 있었다. 미국의 비행기나 잠수함의 눈을 피하기 위해 병원선으로 신검자를 실어 날랐던 것이다. 이 무렵〈뻘기이 고개〉에 오르는 차도를 만들고 고사포 부대와 고성능 써치라이트가 설치되었으며 용당 아랫마을의 나종준 씨 집 남쪽 산등성이까지 차도가 놓이고 대포 진지가 구축되었다. 마을의 앞산과 뒷산의 수목 사이로 군용 전화선이 빨랫줄처럼 뻗쳤다. 1944년 말부터 기름 부족으로 민간인 자동차는 목탄을 사용했다 자동차 꽁무니에 큼직한 드럼통 같은 것을 달고 그 속에다 숯을 피웠다. 운전수와 조수가 계속 부채질을 해야 하며 속도도 느렸고 언덕길에서는 엔진이 꺼지는 일이 많았다. 일제가 검역소 시설을 완성하며 침략 목적으로 이용한 기간은 35년간이었다. 일제가 물러감으로써 검역소의 기능은 마비되고 소수의 원주민만 남아서 덩그렇게 방치된 건물을 지켰다. 미군정 기간을 거치고 우리 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검역소는 주인이 없는 빈집으로 방치되고 있었다. 6ㆍ25전쟁이 발발하고 1ㆍ4후퇴 때 북에서 온 피난민들이 용당으로 몰려오면서 검역소 본관 건물과 창고 등이 그들의 보금자리가 되었으며 자리를 구하지 못한 피난민들은 곳곳에 판잣집을 지었다. 1970년대 초 동명목재에 의해 신선대가 재개발되면서 검역소 본관과 부속 건물, 판잣집들이 철거되었다. 남명진(1914년 생) 씨는 그 당시 이곳 용당동 2번지 11,200평 판자집에 살던 주민들은 100여 세대 500여명으로 1976년 동명목재가 들어오는 것과 관련된 진정서를 청와대에 넣기도 했다고 한다. 1945년 늦은 봄의 어느 날 정오 무렵 어뢰를 맞아 반쯤 선체가 물속에 잠긴 관부연락선 한척이 전속력으로 내해로 들어오고 있었다. 엄청난 뱃고동 소리로 물살을 가르며 흰 거품을 뿜어내던 연락선은 부산항을 지척에 두고 침몰하기 시작했다. 남구 감만동의 모래구찌 앞 〈나부이〉로 불리는 두어 개의 작은 돌덩이가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해상이 그 배의 무덤이 되었다. 이 배는 간조 때만 선체를 들어내며 6ㆍ25사변 이후에도 모습을 보이다가 그 후 수중 폭파된 것으로 전해진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