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파제공사| 용당동
방파제 공사는 1939년에 착공하여 3년여 만에 완공했다. 방파제는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닌 석축이었으므로 바다 밑바닥에서부터 성을 쌓듯 돌 하나하나를 짜 맞추었다. 기중기와 몽구리가 동원되고 배와 잡역부까지 동원된 어려운 공사였다. 바닷물의 유입을 원활히 하여 방파제의 안전도를 높이기 위해 수면까지만 돌을 쌓고 상판은 석축과 콘크리트를 섞어 사용했다. 방파제는 중ㆍ일 전쟁 중인 일제가 군사 목적을 위해 만들었으므로 공사 방법 또한 군대식이었다. 돌은 질 좋은 용당 석산의 화강석을 다듬어 배로 실어 날랐다. 돌 싣는 배를 접안시키기 위해 거리가 가까운 들 섶에 잔교1)를 세웠다. 이 잔교는 이종택(李鍾澤) 씨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며 잔해가 해방 후까지 남아 있었다. 잡역부가 로프로 큰 돌들을 묶고 기중기로 들어 물속에 집어넣으면 대기하고 있던 몽구리가 터를 잡아 하나씩 짜 맞추는 식이었다. 그 날의 일기와 몽구리의 역할에 따라 그날의 작업 진척도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몽구리’라는 말의 어원은 개구리의 옛말 ‘머구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몽구리가 한번 바다 밑으로 내려가려면 무려 18관이나 되는 장비를 갖추어야 한다. 두터운 내의를 두세 겹 껴입고 잠수복 속으로 들어가 구리로 만든 잠수복인 가부도를 덮어쓰고 꽉 조인 다음 앞가슴과 뒷가슴에 납덩이인 노도를 매단다. 잠수복이 2관이고 가부도가 6관, 노도가 7관이다. 그리고 나서 나막신 같은 3관짜리 쇠신을 겹쳐 신고 물밑으로 가라앉는다. 1) 잔교(棧橋)는 여객선 혹은 어선들이 선착장에서 사람 혹은 짐을 싣고 풀기 위하여 마련된 일종의 가교로서 주로 섬의 방파제와 연결되어 바다 위에 띄워 놓은 작업 상판을 뜻한다. 거의 목재 잔교가 많은 편이고 곳에 따라서는 폐선의 상갑판을 이용하는 잔교도 있고 철재 혹은 콘크리트로 된 잔교도 있다. 이 잔교 시설 지역은 남해안 도서 지방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이것은 남해 도서 지방이 서해에 비하여 비교적 조수 간만의 차이가 약하고 물이 빠진 간조 시에도 각종 배들이 접안 할 수 있기 때문이며 동해안 쪽은 섬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여객 수송 잔교 시설은 별로 없다 한 번 물 속으로 들어갔다 하면 두세 시간, 길면 여섯 시간이 걸릴 때도 있다. 몽구리 배는 보통 5명이 탄다. 물 밑에 내려간 몽구리의 모든 행동과 바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사람은 몽구리의 조수인 ‘주내기’다. 두 사람이 쉬지 않고 펌프질로 산소를 보내면 한 사람은 노를 저어 서서히 배를 움직이며 산소 호스가 풀려 나가는 곳을 따라 몽구리의 움직임을 따라 다닌다. 햇볕이 좋으면 수심에 따라 거의 10m 앞까지 밝게 보인다고 한다. 물 속에서 윗장에 연락하는 방법은 몽구리가 산소 호스를 두 번 당기면 돌을 내려 보내고 세 번 당기면 위치를 수정하고 연달아 당기면 위험 신호로 알았다고 한다. 이처럼 어려운 작업을 거치면서 일을 하다가도 일기가 불순하면 작업을 중단했다. 일제가 신선대 앞 방파제 공사를 얼마나 서둘렀던가를 보여 주는 그 무렵 용당 아이들이 부른 동요가 있다. 아사다요지한다(아침이되었네벌써네시반) 벤또바꼬사게데(도시락통허리춤에꿰어차고서) 이애오데루데루(삽작문밀치면서집나서시는) 오야지노수가다(아버지뒷모습이언뜻보이네) 방파제는 외해 쪽이 길이가 약 150m쯤 되는 반원형이었고, 상판에 석재와 콘크리트로 바람막이용 울타리를 만들었으며 내해 쪽은 직선 방파제로 100m 정도였다. 상판의 폭은 2m 내외였고 배가 드나드는 만 입구는 4-50m 폭이었다. 뭍에서 남북간 방파제의 거리는 200m였다. 검역소 본관 건물 앞 해변에 상판 콘크리트로 만든 20m정도의 잔교를 설치하여 선박이 접안했고 검역소 설치 때 세웠던 남쪽의 잔교는 그 후 해체되었다. 방파제가 준공되면서 용당의 명물이 되었다. 맹뭍또는 명뭍이라 불려 왔던 지명도 차츰 사라지고 신선대로 복권되었다. 방파제가 들어서기 전, 맹뭍은 대한해협의 세찬 물살이 거침없이 밀고 들어오는 맹뭍(猛뭍)이었다. 산자락을 깎아서 다다목을 만든 것도 맹뭍을 스쳐 오는 물살에 의해서였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면서 검역소의 업무량이 많아졌고 종전을 앞두고는 징용과 징병으로 가는 조선인들을 싣고 신체검사를 받기 위해 드나드는 배들로 붐볐다. 방파제가 용당 사람들에게로 돌아온 것은 해방되면서였다. 군사 보호 지역으로 일본인들의 접근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물러간 후 방파제는 낚시꾼들에게는 좋은 낚시터가 되었고 뱃사람들에게는 태풍 때 좋은 피난처가 되었으며 다다목 주변 해역은 웬만큼 불어오는 바람에도 잔물결만 일 뿐 호수처럼 잠잠했다.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방파제 안에 계류해 둔 원목들이 파도에 밀리면서 방파제가 크게 파손되었다. 1960년 초 동명목재가 들어오면서 해안의 일부가 매립되고 안쪽 직선 방파제를 더 키워서 선단에 이순신장군 상(像)을 세우면서 동명목재의 전유물이 되었다. 방파제 안팎이 모두 나왕 원목의 저장소로 쓰였다 80년 초 동명목재가 문을 닫고 부산항 제3단계 개발 사업이 진행되면서 방파제 주변 해역이 매립되어 뭍으로 변하였다. 1942년 초 준공된 방파제는 40여 년 만에 땅 속에 그대로 잠들게 되었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