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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성부 해체와 마을회관 건립| 용당동

해방 이듬해에 축성부 건물을 철거하여 마을 회관을 신축한 것은 화합과 단결, 그리고 새 출발을 의미했다. 마을 회관을 짓는 일에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했다. 몇 척의 배를 나누어 타고 가서 오륙도의 맞은 편 승두말에서 뭍에 올랐다. 승두말은 동해와 남해를 가르는 분기점이다. 승두말의 서북쪽 일대는 용호, 용당 사람들이 군함 또는 요새라 부르는 일본군의 축성부가 있었다. 일제가 이 곳을 요새화한 것은 1916년 경부터였다고 한다. 그들은 부산항의 외곽인 태종대와 아치섬, 오륙도 등을 연결하는 해안선 일대를 요새 사령부 작전 지구에 소속시켰다. 축성부의 지형을 살펴보면 동쪽, 서쪽, 북쪽의 삼면은 병풍처럼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바다에 접해 있다. 평지는 적으나 골이 깊고 울창한 숲으로 덮인 정남향으로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앞으로는 망망대해가 펼쳐지는데 약 300m 전방에 오륙도가 앞을 가려 몸을 드러내지 않아도 먼 바다까지 살필 수 있다. 대마도가 한 눈에 들어온다. 부산 외항에 자리하여 항내를 드나드는 대소 선박을 앉아서도 지켜 볼 수 있으니 요새로는 최적지였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왜적들이 분개 마을에 쳐들어왔을 때 주민 몇 가족이 군함의 후미진 곳에 은신했다고 한다. 왜적들이 산을 뒤졌으나 숲이 울창하고 기암괴석이 해안선을 이루어 찾기를 단념하고 돌아가려 할 때 피난 올 때 따라왔던 개가 짖어서 모두 참변을 당했다고 한다. 해방 이듬해에 군함(축성부)에는 포가 3문 있었다고 한다. 미군정 하 시대였으므로 일본군이 버리고 간 군사 시설을 지키는 사람도 없었고 관리하는 기관도 없었다. 용당 주민들이 나서서 기와를 벗기고 판자와 재목을 헐어서는 배로 실어 날랐다. 이 자재로 아랫마을의 중간 지점인 일본인 무라가미의 집 옆 빈터에 마을 회관을 건립했다. 마을 회관은 연 건평이 63평이었다. 20평짜리 교실 2칸, 상하층 5층씩 사무실 2칸, 창고 10평, 화장실 3평으로 건물 철거에서 준공까지 1,610명이 동원되었다. 잡역부 1,500명, 목수 50명, 미장이 60명이 동원된 대역사(大役事)였다. 이렇게 준공된 회관에서 동 사무를 보고 대동회가 열렸으며 뜻있는 젊은이는 야학을 열었다. 1950년 초부터 동항초등학교 용당분교가 되어 저학년 학생들의 배움터가 되었다. 분교는 1965년 용당국민학교가 신설되면서 폐쇄되었고 회관과 부지는 동명목재로 넘어갔다. 동명목재는 회관 건물을 철거하고 주변의 농경지와 함께 복토한 후 창고 건물을 세웠다. 현제 용당 세관 창고 건물의 일부는 마을 회관 터에 앉아 있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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