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주면 체육대회| 용당동
용주면 운동회의 시작은 서면(西面) 대운동회에서였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 있었던 이 운동회에 용당에서도 선수를 출전시켰다고 한다. 참가 선수 중 이름이 남아 있는 사람은 김영만(金令滿), 최삼룡(催三龍), 이의천(李儀千), 박성룡(朴成龍) 씨이고 이외에도 여러 명이 있었는데 여자 선수도 있었다고 한다. 1943년 일제가 연전연승할 무렵 부산공설운동장에서 부산부민운동회(釜山府民運動會)가 열려 용당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구경갔으나 선수로 출전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944년경 제1회 용주면 운동회가 열렸을 때는 일본인도 참가하여 우리 선수들과 함께 뛰었다. 1945년은 일제가 패하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열리지 못했다. 운동회의 명칭이 왜 용주면인가 하는 것은 역사에서 알 수 있다. 오늘의 남구는 삼한 시대에는 변한에 속했으며 6가야 이후 거칠산국을 거쳐 통일 신라 이후에는 동래군에 편입되었다. 후삼국시대에는 견휜의 지배를 받았으며 고려시대에는 양주군에 소속되었다. 이조시대에 와서는 영조 때 동면과 남촌면에 소속되었으며 대한제국 말기인 1910년 1월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용주면이라 부르게 되었다. 1936년 동래군 용주면과 남면 일부가 부산부로 편입되고 부산진 출장소가 생기면서 대연동, 용당동, 용호동, 감만동, 우암동을 포함한 용주면 시대가 막을 내렸다. 용주면의 마지막 면장은 전남식(全南植) 씨로 알려져 있다. 용주면이라는 지명은 용의 전설에 기인한다고 하는 설도 있다. 옛날부터 용당과 용호동은 용의 전설이 많은 고장이다. 용이 입에 물고 다니면서 온갖 조화를 부린다는 여의보주(如意寶珠)를 줄이면 용주(龍珠)가 된다. 일제에 의해 용주면이라는 명칭이 사라졌음에도 체육대회의 명칭으로 사용한 것은 용의 전설과 함께 빼앗겼던 우리의 것을 도로 찾으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1946년 가을, 해방 후 첫 운동회가 (구)대연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열렸을 때 운동장은 만남의 광장이고 웃음꽃이 피는 해후의 장소였다. 이때의 경기 종목은 단거리, 중거리, 마라톤, 동 대항 릴레이, 모래 가마 지고 달리기 등이었는데 용당 선수들은 육상 종목에 강했다. 용당 선수들은 46년부터 48년까지 3년간을 연속 우승함으로써 3연패의 위업을 달성했고 3년 연속 우승하면 대회기를 영원히 소장한다는 규칙에 따라 대회기를 받았다. 이날의 운동회에서 3년 연속우승의 주역으로 가장 박수를 많이 받았던 사람은 마라톤에서 우승한 유영구(劉永逑) 씨였다. 당시 마라톤 코스는 대연동 운동장을 출발하여 수영 다리를 돌아오는 긴 노정이었다. 우승기 및 마을 기는 동사무소에서 보관하였으나, 6ㆍ25를 거치면서 유실되었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