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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대| 용당동

봉화(烽火)에는 봉(烽)과 수(燧)의 두 종류가 있었다. 봉은 관솔을 넣은 싸리나무가지에 불을 붙여 드는 것이고, 수는 섶이나 나무에 불을 지펴서 그 연기를 올리는 것이다. 봉은 밤에 쓰고 수는 낮에 쓴다. 전국의 30리마다 산 위에 있는 봉수대에서 수를 올릴 때는 이리의 똥(狼糞)이나 말의 똥(馬糞)을 말려서 태우는 데, 낭분과 마분의 연기는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흩어지지 않고 하늘로 치솟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부산 지방에는 황령산(荒嶺山 : 전포동 뒷산), 간비오산(干飛烏山 : 우비오산(于飛烏山)이라고도 했음, 해운대 뒷산), 응봉(鷹峰 : 다대포 본동 북쪽 아미산), 계명산(鷄鳴山 : 범어사 동북쪽 산봉우리), 구봉(龜峰 : 구봉산), 오해야(吾海也), 석성(石城 : 남부민동 천마산인 것으로 보임)등에 7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부산 지방에서 이처럼 봉수대가 많았던 것은 적과 접촉이 많은 해안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적정을 보고 할 때 드는 횃불의 수를 보면 평상시에는 한 개,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두 개, 해안에 접근하면 세 개, 전투가 벌어지면 네 개, 적이 상륙하면 다섯 개였다. 봉수대가 제 기능을 발휘하던 시절 보오지산 봉수대는 전방 분소로 여겨진다. 적정의 탐지 장소인 망너머 고개와 연결된 하나의 통신 체계였다. 보오지산에서 드는 횃불은 황령산 봉수대나 간비오산 봉수대에 전달되었다. 부산 지방에 있었던 7개의 봉수대 중에서 오해야 봉수대는 조선 영조 때, 석성 봉수대는 현종 때 구봉으로 이설 폐지되었다고 한다. 조선 영조 때 폐지된 오해야항 봉수대의 위치에 대하여 상반된 두 견해가 있다. 하나는 오해야항 봉수대가 사하구의 승학산에 있다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석포 목장이 있는 용당 쪽에 있다는 견해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p23권의 동래현 기록에 의하면 “오해야항은 동평현에 있으며 현까지의 거리는 43 리이고, 황령산 봉수대는 서쪽으로 오해야항과 북쪽으로 계명산 봉수와 응하며, 오해야항 봉수는 동으로 황령산에 응하고, 서로 김해 성화례산에 응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동래부읍지』기록을 보면 “오해야항을 부(府)의 서남쪽 43 리에 있다. 승악산(勝岳山)에서 이어져 내렸다. 목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6번 동래조를 보면 “오해야항은 오륙도가 있는 승두말 반도 지역으로 표기되어 있다.” “오해야항 동쪽 바다에는 오륙도가 있고, 동쪽으로 석포 목장이 표기되어 있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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