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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산판과 돌방구| 용당동

용당 사람들이 돌산판으로 불렀던 석산은 용당동 산 76번지 일대로 현재 극동석유주식회사가 자리 잡고 있다. 이 돌산은 질 좋은 화강석으로 형성되어 멀리서 바라보면 숲 사이로 흰 돌들이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내어 푸른 바다와 그윽이 조화를 이루어 운치가 있었다고 한다. 4월 착공하여 1928년에 마무리 된 제 1,2부두 확장 공사 때부터 디 돌산에서 돌을 캐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공사는 총독부에서 감독하였으며 제1부두는 1925년 11월1일 준공을 보았고 제2부두는 1929년 3월 25일 마무리 되었다. 석재는 부산항의 서남방 6리 떨어진 당시 동래군 사하면 구형리 감래포(甘來浦)의 서쪽 해안 송정 끝에 있는 외딴 언덕 8,767평을 매수하여 썼으며 또 석재의 일부는 용당에서 충당하였다. 부산시가 발행한 『항도 부산』 제2호에 나타나 있는 바에 따르면 용당 석산의 채석은 1920년대에 들어와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며 〈모래 구찌〉와 그 주변에서 진사토(眞砂土)를 채취한 것도 석산의 채석과 같은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석산의 착평은 해방 후 까지 계속되었으며 감만동 아랫강변에 공장이 설치되었다. 1919년 일본인들은 석산을 이시야마(石山)라 했고 모래 구찌의 토산을 도야마(土山)라 했다.〈모래 구찌〉의 어원은 〈부산항의 입구에 있는 모래산〉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 말은 부산 내항에 방파제가 축조 된 다음에 〈모래구찌〉가 탄생되었음을 말해 준다. 즉 모래 구찌는 한국어와 일본어의 합작어인 셈이다. 일설에는 토사 채취 당시 현장 감독이었던 일본인의 이름 중 〈모리야마〉와〈모리모도〉의 “모리”가 변형되어 생겼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의 의견은 당시 토산이라 물렀던 황사산(黃砂山)이 바로 모래산이며 모래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돌산이 착평 되면서 한적했던 용당 마을에 유입 인구가 늘어나서 북적거렸다. 석수와 목도군, 철로군과 잡역부들이 몰려왔다. 잡역부 중에는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여자들이 하는 일은 큰 돌덩이를 망치로 때려서 잘게 부스는 세석 작업이었고 돌수레를 미는 사람도 있었다. 석산의 가족들이 한두 집씩 용당에 셋방을 얻어 눌러 앉으니 이들을 총칭하여 〈철로꾼 가족〉이라고 했다. 〈철로꾼〉이란 돌 수레를 밀고 다니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복선을 깐 레일 위로 튼튼하게 나무로 짜 맞춘 돌수레에 돌을 가득 싣고 두 사람이 밀면서 바닷가에 설치된 잔교(棧橋 : 해방 전부터 있었음)로 가서 대기 중인 돌 싣는 대형 목선에 부었다. 석산의 작업장에는 삼, 사십 명에서 많을 때는 백여 명이 일을 했다. 이들 공사장 인부들에게 밥도 팔고 잠자리도 제공하는 〈한방집〉이 생기고 많은 사람들을 통솔하는 작업장 책임자도 생겨났다. 석수들 가운데도 빼어난 석수들이 있었는데 〈하선네〉, 〈자갈십장〉,〈최백덕(崔百德)〉 씨 등의 이름은 용당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아 있었던 이름들이다. 매일 정오와 오후 여섯 시면 어김없이 발파(發破)작업을 했다. 석수가 정과 해머로 바위에 남포 구멍을 뚫으면 TNT를 장치하여 암벽을 폭파했다. 발파 때면 폭음과 함께 돌이 날아다녔다. 이 발파를 용당 사람들은 ‘남포 터준다.’라고 했다.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가 없이 생활하던 용당 사람들에게 하루 두 차례의 남포 소리는 시간을 알려 주는 지침이 되었다. 들일을 하다가 남포 소리를 들으면 점심 준비를 하고 저녁 남포 소리를 들으면 허리를 펴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발파가 끝나면 돌을 선별하여 용도에 맞게 잘게 부수기도 하고 덩어리로 내가기도 한다. 큰 돌덩이는 목도질을 한다. 두 사람이 한 조가 되기도 하고 사,오명이 한 조가 되기도 한다. 어깨에 메는 목도체는 길이가 2m가 조금 넘고 굵기는 직경이 5㎝~6㎝정도의 둥근 나무였다. 큰 중량을 운반해야 하므로 목도채는 탄력이 좋은 나무라야 한다. 그래서 고로쇠나무나 사시나무를 많이 사용하였다. 목도끈을 두 겹으로 하여 목도채를 어깨에 메고 걸으면 짐이 땅에서 한 뼘 정도 떨어지게 된다. 목도꾼이 목도질을 할 때는 목도 소리를 한다. 짐꾼들이 발을 맞추려면 호흡이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목도 소리는 연장자나 숙련자가 앞소리를 하며 나머지 사람들이 소리를 받아서 뒷소리를 한다. 앞소리 〈용당 돌산에서 흰 돌을 떠서〉라고 운을 떼면 뒷소리 〈물길 막아 다리 놓고 어기여차 어기영차〉하고 받는다. 앞소리 〈맹뭍 막아 돌담 치고〉하면 뒷소리 〈어기여차 어기영차〉하고 뒤를 받친다. 채석장은 언제나 낙석의 위험이 있으므로 낙석의 위험을 줄이고 작업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 석산의 중허리까지 덮여 있는 사질토를 폭 10m, 길이 150m 가량 정상까지 파내고 중간에 긴 계단을 만들어 통로로 사용했는데 이 계단을 산의 중상층을 들어내고 하나의 계단을 만들었다고 해서 〈주땅(중간 계단)〉이라고 불렀다. 이 주땅의 위쪽 정상에 1942년 일제가 신사(神事)를 들어 앉혔다. 윤랑근 씨는 돌산이 젊은 산으로서 산을 깎을 때 일꾼들의 피해가 있으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신사는 외부에서는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게 돌을 쌓아 울을 쳐 두었으며 새소리도 들리지 않아 한낮에도 냉기가 돈다고 하였다. 해방 전 석산의 경비를 맡았던 사람의 말에 의하면 바람이 몹시 불고 폭우가 퍼붓는 밤이면 주땅에서 ‘따각 따각’하는 말굽 소리와 ‘뎅그렁뎅그렁’하고 말목에 매단 요령 소리가 들려서 오금이 저렸다고 한다. 외진 곳에 있던 이 신사가 참배객 없이 남포 소리만 듣다가 해방 후 어떻게 사라졌는지 없어지고 말았다. 돌산의 북동쪽 끝 지점은 아랫마을의 서남쪽 뒷산 아래쪽이다. 이곳에서 인가가 끝난다. 옛날에는 마을의 끝 지점에 〈도갓집〉이 있었고 그 뒤쪽에는 강일득 씨 집과 박용술 씨 집이 나란히 이웃해 있었다. 뒤쪽 뫼에는 오두막 만한 잿빛의 바위가 있었는데 원래는 하나였으나 둘로 쪼개져서 동서로 20㎝ 쯤 벌어진 채 나란히 서 있었다. 이 바위의 이름이 〈돌방구〉였다. 아이들이 타고 앉아서 아랫마을을 굽어보면 눈 맛이 제법 상쾌했다. 그래서 돌방구는 아이들의 사랑을 받았고 다정한 친구가 되었다. 〈돌방구〉란 ‘돌바위’란 뜻이다. 물오리나무와 키 작은 소나무들과 돌방구는 잘 어울렸으며 아이들이 전쟁놀이를 할 때면 이긴 쪽에서 돌방구를 차지하고 올라서서 만세를 불렀다. 1959년 말 경부터 극동 석유에서 두, 세 명의 직원을 현장에 파견하여 채석 작업을 시작했으며 몇 해 후부터 착평 된 장소에 정유 공장을 세워 나갔다. 뒤이어 동명목재 상사에서 석산의 개발에 참여하고부터 하루가 다르게 돌산 주변은 변화를 겪었다. 동명목재는 여기서 나오는 흙으로 〈다다목〉을 매립하는 일석이조의 공사를 했다. 80년대 초 동명목재가 손을 떼고 난 후 콘테이너 회사가 관여하면서 돌방구의 영역은 점점 잠식되어 갔으며 80년대 말 경 드디어 돌방구는 최후의 날을 맞이했다. 돌방구는 발파와 함께 사라졌으며 뿌리에서 두텁고 펑퍼짐하게 보이는 큰 바위가 나왔는데 은빛의 화강석이었다. 이 바위 덩어리를 깨기 위해 남포 구멍을 뚫고 폭약을 장치하여 발파를 하니 인근 100m의 주택가에 심한 진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집이 통째로 흔들리고 벽에 금이 가고 방안에 있던 사람 모두가 진동과 놀라움으로 몸이 떨렸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인근 지역 주민의 분노는 집단 민원으로 확대되어 집단 농성이 연일 이어지면서 컨테이너 회사와 협상 끝에 약간의 보상을 약속받고 수습되었다. 이렇게 돌방구는 용당 사람들의 생활에서 사라져 갔다. 이 곳의 부경대 용당 캠퍼스 바다 쪽 봉우리에는 일제시대 때에 일본인들이 만든 신사가 있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바다를 매립하기 위하여 감만동의 석산을 파내어 앞바다를 매립한 공사를 하였는데 사고가 자주 발생하여 일본인들이 피해를 입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풍수지리에 의하여 조선인들의 길을 막기 위해 이곳에 일본 신사를 지었다. 자신들의 일본 신이 조선의 토속적인 신을 억눌러 버리기 위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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