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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발굴사건| 감만동

보물 발굴 사건 1970년대 초반에 감만동 아래 강변이 다시 주목을 끌게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제가 태평양전쟁 때 대규모의 군소 공장을 건설하고 중국대륙에서 약탈한 수 천억대의 금은보화를 묻어 두었다고 알려지게 된 것이다. 금괴, 은화, 다이아몬드, 금불상과 망간 니켈 등 광물 수백 톤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패전한 일제는 철수하기에 바빠 보물을 꺼내지도 못하고 입구를 폭파시켜 덮어 버렸다고 했다. 이곳 어뢰 공장의 구조, 보물의 매장량 등을 상세히 기록한 보물지도를 당시 이곳에 근무한 일본군 장교로부터 입수한 사람이 나타나 유력자의 후원으로 연합철강과 군부대가 있는 일대를 발굴했으나 보물을 찾아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그 당시의 전말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술한 내용이 있어 인용해 보고자 한다. 국제신문 경제, 사회, 국제, 교열부 기자를 역임한 이종률(1958년 생)의 저서 “테마로 보는 부산항 이야기”에 기술 되어 있는 적기만 보물 동굴 편의 내용을 옮기면 아래와 같다. 적기만 보물동굴 … 전략 보물을 파묻고 퇴각하다. 비밀의 동굴에 금은보화가 감춰져 있다. 우연히 보물지도를 입수한다. 일확천금의 희망을 안고 노다지를 찾아 헤맨다. 천신만고 끝에 찾아낸 보물창고, 그러나 동굴 속은 탐욕과 허망만 가득할 뿐이다. ‘금불상 은수저가 가득한 십리(十里)동굴’ 전설은 한 마을 건너 구전되어 올 만큼 한반도 어딜 가나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금노다지 보물동굴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싫증나지 않는다. 부산 적기만(赤崎灣) 해저에 은닉된 수 조원대의 보물, 부산 토박이 치고 이 ‘금노다지 비밀창고’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다. 1980년대 초 노다지 꿈에 부풀어 패가망신한 숱한 후일담은 술자리마다 바닥나지 않는 안주감이었다. 전설같은 보물 동굴의 이야기 보따리가 풀리기 시작한 것은 2차대전 종전 무렵. 36년동안 조선을 침탈 통치해온 일본군은 2차대전 당시 부산 남구 용호동과 우암동, 감만동 일대의 세칭 적기만에 해저 잠수함 기지를 건설했다. 대동아 전쟁 막바지 한국 아카사키(赤崎)만에 주둔한 일본군 제122 독고부대는 군비자금용으로 한국과 중국 등지에서 강탈한 수조 원 대의 금붙이를 미처 일본으로 빼돌리지 못하고 적기만 해저 잠수함 도크와 어뢰 공장, 화약 공장과 군수물 창고속에 매몰시켜둔 채 퇴각했다. 당시 독고부대가 파묻은 노다지는 금괴 수백 t과 금동불상 36좌, 은 3백50t, 비취불상 1좌, 다이아몬드 1천6백개, 수은 텅스텐니캘 2백 상자와 각종 패물, 독고부대 사령관은 기지 내부도와 배치도 등 보물들을 수장한 4장의 비밀지도만을 갖고 일본으로 쫒겨갔다. 비밀 통로 발견 20여 년이 지난 1960년대 후반, 보물지도는 우여곡절 끝에 한국인의 손에 건네졌다. 해방직후 전설처럼 떠돌던 적기만 보물지도를 맨 처음 입수한 사람은 잠수함 기지 사령관의 여동생과 결혼한 김성태 씨, 김씨는 노년을 적기만 보물찾기에 바쳤으나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하고 가산만 탕진한 채 1977년 작고했다. 일제 때 일본 항공대를 나온 그는 공군 자위대에 근무하던 중 당시 잠수함기지 사령관 다카시마의 여동생과 결혼, 처남으로부터 비밀기지 배치도를 입수했다. 김씨는 귀국 후 육군 소위로 입대했다가 다시 공군에 편입, 대령으로 예편한 것으로 전해진다. 1960년대 후반 지도를 입수한 김씨는 1972년께 동아대 지질학과에 재직중이던 구준택(具駿宅:1984년 작고)교수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그는 혼자서 이 지도에 그려진 지역을 찾아 나섰다가 지도상의 방향표기가 불분명한데다 문제의 해안이 이미 연합철강에 의해 매립되어 버린 뒤여서 가산만 날리고 친척이나 심지어 가족들로부터도 보물에 미친 이로 따돌림을 받던 처지였다. 구교수는 김씨가 건네준 4장의 지도가 현장을 지켜본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그릴 수 없을만큼 세밀한 점과, 가까스로 입수한 1951년도의 부산항 내만 해도에서 수심이 가장 깊은 곳이 적기만인데 놀라 보물이 묻혔다는 지도의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잠수함이 드나들려면 우선 수심이 깊어야 하기 때문이다. 매장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한 정찬영(鄭燦泳:당시 26세)씨가 발굴팀에 합류했다. 1970년 초의 일이었다. 정씨는 일인이 경영하던 토건회사에 근무했던 부친으로부터 잠수함기지 매장보물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이 일에 뛰어 들었다. 때마침 부산시가 우암동 일대 도로확장 공사를 벌이던 중 비밀기지 통로로 추정되는 3개의 대형 암굴이 발견됐다. 언론들은 이 같은 사실을 크게 보도하기도 했다. 실패로 끝난 시추 탐사 1979년 12월 발굴팀은 용호동 바닷속에서 해상통로로 짐작되는 지름 3,4m길이 40m 가량의 수중통로를 발견했다. 정씨 등이 발견한 인공 굴은 40m지점에서 토사로 가로막혀 있었다. 해저에 설치된 철도레일과 어뢰 한 정이 발견되면서 발굴작업은 활기를 띠었다. 1982년 1월 19일 일간신문들은 발굴팀이 당국에 발굴허가를 신청하였다는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서울의 재력가 서재금씨(당시 51세)를 비롯, 전국에서 30여 명이 자본을 대겠다고 나서 보물찾기는 무르익어 갔다. 같은 해 4월 7일. 발굴허가권을 쥐고 있던 육군본부는 이들에게 육본으로 들어와 상황을 설명해줄 것을 요청했다. 정씨와 구교수 등 발굴업자 4명과 군 관계자 3명 등 7명이 출두한 ‘보물찾기 청문회’ 결과 육본측은 발굴작업을 정식 승인했다. 당시 매장물을 발굴하려면 법에 따라 추정되는 매장물 금액의 1백분의 10을 공탁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공탁금이 수십억 원대에 이르자 육본측은 ‘고철 3천5백t을 발굴한다’는 식으로 2천만원의 공탁금을 내는 대신 보물이 나오면 추가로 추정액의 1백분의 10을 낸다는 조건으로 발굴에 착수하도록 선처해주었다. 발굴팀은 연합철강 매립지와 2보급항 매립지등 여러 곳을 시추했으나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나 발굴허가 기간 막바지에 ○○단영내에서 겨우 지하기지 출입구로 추정되는 철판과 지하 콘크리트 구조물을 찾아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발굴 허가 기간이 만료된 뒤였다. 1983년 9월 15일 발굴작업은 중단됐다. 용호동 절벽밑의 수중통로, 지하 10m지점에 묻힌 대형 토관, 오목한 구멍이 규칙적으로 뚫려있는 철판, 철판과 연결되어 있는 벽 쪽의 콘크리트 인공 구조물, 해저에 설치된 철도레일, 일본인이 버리고 간 듯한 어뢰 1정이 비공식적인 수확의 전부였다. 지하에 ‘인공 구조물’이 있다는 사실은 확인했지만 결국 보물찾기는 미련을 남긴 채 육본의 발굴 작업기간 연장 허가없이 파헤쳐진 현장은 되메워지고 말았다. “보물찾기 재개하겠다” 잊혀져 가던 적기만 보물이 다시 세간에 회자된 것은 1990년 3월. 대찬산업 대표 정씨가 지난 1983년 작업이 중단된 지 8년 만에 발굴작업으로 계속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탄원서를 청와대에 내면서였다. 정씨는 1983년 9월 23일 지하 10m지점에서 잠수함기지와 연결되는 입구를 발견하고 군에서 파견된 감독관 입회 아래 이를 확인했으나 허가기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발굴작업이 중단됐다며 지금까지 육군본부와 당시 발굴업무를 관장했던 부산 군수기지 사령부에 수차 허가기간 연장신청서를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고 탄원했다. 정씨는 또 탄원서에서 “육군본부에 연장신청을 하면 ‘부산 군수기지 사령부에서 1983년 9월 15일자로 발굴작업 종결보고서가 제출됐기 때문에 현지 사정을 모르고 있는 우리로서는 부산 군수사가 입구를 찾았다는 확인서를 보내주어야 재심사할 수 있다’는 대답이었고, 부산 군수사에 가면 ‘발굴작업 허가기간이 끝난 마당에 그와 관련된 보고를 다시 올리려면 육본의 지시가 있어야 한다’는 답변만 되풀이돼 왔다‘고 주장했다. 당시 정씨의 탄원사건을 추적했던 주간조선(週刊朝鮮) 우종창(禹鐘昌)기자와 1982년 현장에 파견돼 발굴작업 과정을 지켜보았던 군 감독관의 인터뷰를 다시 들어보자. - 잠수함 기지의 입구로 추정되는 지점을 발견했을 때의 상황은. “○○단 목공소 뒤 야산 밑에서 지하 출입구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단 단장과 본인, 그리고 정찬영씨가 토관 속으로 들어갔다. 토관은 우물을 파듯이 지하 10m쯤 아래로 묻혀 있었다. 바닥에 진흙과 물이 고여 있어 눈으로 확인하기에는 곤란했다.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더니 오목한 구멍이 규칙적으로 뚫려있는 철판이 만져졌고 들어올리려고 힘을 썼지만 굉장히 무거워 올릴 수 없었다. 철판과 연결돼 있는 벽 쪽엔 시멘트로 콘크리트한 두꺼운 인공 구조물이 있었다. 갖고 간 곡괭이로 내려치니 ‘꿍’ 하며 소리가 들려 지하가 텅 비어 있음을 느끼게 했다.” - 그렇다면 발굴을 계속해야 됐던 것이 아닌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정씨가 문제의 지역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발굴 허가기간이 끝난 뒤였다. 그때는 발굴작업을 계속하기 위해 파내려간 것이 아니고 군 부대의 명령에 의해 매몰작업을 벌이고 있던 중이었다. 정씨는 파놓은 구덩이를 묻는다고 하면서 남모르게 발굴을 계속하다 지하출입구를 발견했기 때문에 작업을 계속 할 수 없었다.” - 그 때가 언제인가. “허가기간을 일주일쯤 넘긴 1983년 9월 23일경으로 기억한다.” - 출입구로 추정되는 지역을 발견한 뒤 상부에 보고는 했는가. “지하에서 철판과 인공 콘크리트 구조물을 발견했다는 보고서를 ○○단 단장을 통해 부산 군수사에 제출했다. 당시 본인과 ○○단 단장이었던 유락종 대령은 보고서에다 파볼 가치가 있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 그 후에 어떻게 되었나. “보고서는 올렸지만 내 입장에선 상부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발굴 연장허가가 없어 파놓았던 우물은 흙으로 매립했다.“ - 지하에 잠수함 기지가 있다고 보는가. “거기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대답할 입장이 아니다. 다만 ○○단에 5년간 근무했고 발굴작업을 지켜 본 나로서는 지하에 인공구조물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밝힐 수 있다.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그 구조물이 잠수함기지라고 단언하기는 곤란하다.” - 파 볼 가치가 있다고 보는가. “그때 보고서에도 썼지만 발굴할 필요성은 지금도 있다고 믿는다.” 해저동굴 속에 파묻힌 수조 원대의 노다지. 한때 온 국민을 가슴 조이게 했던 적기만 보물 창고는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부산항이 간직한 또 하나의 미스터리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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