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활/역사

home 남구이야기 > 생활/역사
  • facebook
  • twitter
  • twitter

60,70년대 이후의 우암동민의 생활사| 우암동

60,70년대 이후의 우암동민의 생활사 이미지

60,70년대 이후의 우암동민의 생활사 1963년 최두고(국회 건설분과 위원장)국회의원이 출마 시 공약 사항을 이행하여 당시 살고 있는 집들의 불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때 무조건 평당 1,000원씩 불하를 받아 현재 3평에서 10평정도 규모의 집을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집들의 형태가 특이하다 대개 2층이 1층보다 작은 법인데 우암동의 집들은 2층이 1층보다 더 크다.

김상준씨에 따르면 원래 다닥다닥 붙은 작은 집에서 살다가 점점 자녀가 성장하게 되면 불법으로 개조하여 2층을 만들 수밖에 없게 되는데 조금이라도 더 넓게 사용하기 위해서 2층을 1층보다 더 크게 만들게 되어, 대부분의 집들이 2층이 1층보다 한 뼘 정도 더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선친 때부터 우암동에 살았고 우암동사무소에 근무했던 김춘남(1944년 생) 씨는 자신이 근무할 때 “슬레트 집을 약간 올려서 자식들이 겨우 앉을 수 있는 2층을 올린 몇 집이 있었다. 불법 건물로 검찰청에 고발되어 담당자인 자신이 문책을 당하게 되었다 그래서 검찰청에서 검사에게 이곳의 사정을 이야기하니 담당 검사 서기가 현장 확인을 하러 왔었다. 이 곳을 둘러본 담당 검찰 수사관은 우암동의 어려운 생활에 매우 놀라며 문책을 할 것이 아니라 상을 주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전후 집 모양이 갖추어져 가면서 수도와 화장실이 필요하였으나 장소가 없어 공동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1965년경 이곳에는 공동 수도가 2개 있었는데 소유권을 가진 사람이 수돗물을 팔았다고 한다. 그때는 수돗물이 부족하여 잘 나오지 않아서 수돗물 나오는 시간이 되면 물통을 들고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또 공동 화장실도 아침에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고, 주민들이 사용료를 내면 관리자가 분뇨 수거 시에 부산시에 그 돈을 내고 수거했다. 그러나, 그 돈이 아까워서 화장실이 분뇨가 넘칠 때가 많았고, 비가 올 때는 무단 투기를 하여 온 동네에 구린내가 진동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 당시는 별 흠이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분뇨가 넘칠 때 화장실에 들어가면 똥, 오줌을 밟고 다녀야 했으며 추운 겨울철에 앉아서 대변을 볼 때면 똥통에 쌓이고 쌓여 위에까지 올라와 얼어붙은 똥이 몸을 찔러서 앉는 자리에 얼은 똥이 몸에 닿지 않도록 엉거주춤하게 서서 변을 봐야 하거나 발을 놓을 양쪽에 돌이나 블록을 놓고 올라앉아서 볼일을 봐야 했다고 한다. 이런 열악하고 비위생적인 주거 환경 속에서 생활하였는데 결국 동에서 분뇨가 넘치는 일이 없도록 분뇨를 제대로 처리하는 무료수거권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1982년에 이르러서야 공동 화장실 개선 사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남구청 청소 계장을 지냈던 김상준 씨에 의하면 1982년에 불량 공동변소 개량 사업을 실시하면서 11개의 공동 화장실을 개량했다고 한다. 현재에도 공동 화장실 개량 사업은 숙원 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다. 


가. 동항 성당 

우암동의 역사와 발전사를 살펴보면 남구의 다른 지역과 다른 점을 찾을 수가 있다. 우암동의 발전을 이야기 할 때 천주교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밀가루 배급으로 살아야 했던 너무나 힘들었던 시절에 미국 선교 단체 등에서 지원해 준 배급 밀가루가 성당을 통해 사람들에게 분배되었고, 천주교를 중심으로 시민 구제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으로 독일인 신부인 하안토니오(독일명: 안톤트라우네르, Anton Trauner) 신부를 들 수 있다. 그는 1956년 북한 강제 수용소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독일로 귀환 당한 지배르트 신부를 통해 한국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부산에 신부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한국으로 왔다. 1년간 천주교 구교관인 중앙 성당에서 한국말을 배우고 근무하다가 적기 성당으로 파견된 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1년 천막 교회에서 출발한 현재의 동항성당은 1958년 7월 우암2동 125번지에 동항 천주교회로 설립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59년 10월7일에 하안토니오 신부가 본당 신부로 부임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을 거쳐 들어온 많은 외국인 수녀들로 구성된 프란치스코회 수녀들이 가난과 질병을 구제하고 선교하는데 앞장섰다. 하안토니오 신부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가난하였던 지난 날, 마을의 주민들을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가난하고 병약한 사람들과 임산부를 돌보고 구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여 그들에게 재생의 희망을 안겨 주었다. 하안토니오 신부는 지체 장애아를 포함한 일곱 명의 고아들을 사제관에서 키우며 자식처럼 돌보았다. 또한 1977년 봉생신경외과 김시묵 목사와 함께 가난한 산모들을 위한 조산원을 열었으며 집도 가족도 없는 노인들을 위해 모금 운동을 벌여 이들을 보살펴 주기도 하였다. 

1964년 11월15일에는 우암2동에 2천 평 대지 위에 5백 평의 〈사랑의 집〉을 완공하였다. 이 〈사랑의 집〉은 가난한 이웃을 도우며 학습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1964년에는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회인 푸른 군대의 한국 본부를 창설하였으며 1974년부터 매년 2회씩 임진각 자유의 다리에서 평화통일 염원 기도회를 개최해 오고 있다. 하안토니오 신부에 대한 감사와 존경은 우암동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 생각한다. 


나. 한독실업기술학교 

1965년 3월 하안토니오 신부는 사제관에 함께 기거하던 독일인 청년 칼로 슈미케 시와 정순택 씨에게 본래 양재 학원을 위해 건축한 집을 맡기었다 . 당시 슈미케 씨가 정순택(현 청와대 교육 문화 수석 비서관)씨의 제의를 받아들여 중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한독 실업 기술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69년에는 한독여자실업학교의 인가를 받아 학교를 육성시켰다. 또한 같은 해에 동항 유치원을 개원하여 우암동 교육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하였다. 

그 후 한독 여실이 해운대구 우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사용하였던 건물은 현재 동항성당 수녀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다. 우암고등공민학교 동항성당 아래에 있는 두매 약국 자리는 원래 일제 때 창고였는데, 우암동의 역사와 더불어 많은 역할을 한 곳이다. 해방 후에 이 곳에서 몇몇 선각자가 야학을 했었고, 6ㆍ25 후 피난민들이 들어오자, ‘적기피난민수용사무소’가 되어 여기에서 피난민 3,000명~4,000명을 관리하였다. 

1956년에는 몇 몇 교사들이 ‘우암고등공민학교’를 만들어 중학 과정을 가르치기도 했다. 피난민으로 거제도에서 고등학교 학생이었던 박노일(1935년 생)씨는 1953년 우암동에 정착하여 생활하였는데 1954년 당시 송도에 있었던 연세대에 입학하여 대학교에 다니던 중 1956년 이현구(후에 민선초대 동장 역임) 씨, 김중걸(동항초등학교 교장 아들)씨 등과 함께 우암고등공민학교를 만들었다고 한다. 

우암동에 피난민들이 정착했으나 생활이 곤란하여 청소년들의 학업은 전무한 상태였다. 우암고등공민학교에서는 중학교 1ㆍ2학년 과정을 가르쳤다. 2년을 이수한 학생들은 편입 시험을 거쳐 배정중, 동성중, 선화여중, 동주여중, 덕명여중 등으로 전학을 갔고, 1년 뒤 졸업을 하였으며 취업이나 대학 진학 등을 할 수 있었다. 이 학교는 얼마 동안 배정 중학교 분교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며, 1971년 무시험 전형으로 폐교 될 때까지 1,200여명이 수료했다. 맨 마지막까지 학생과 학교의 뒷정리는 손홍종 선생님이 하셨는데, 이분은 특히 사도 정신이 아주 투철했다고 한다. 이 학교의 학생 수는 많을 때는 80명 정도였고, 보통 20~40명 정도였다. 

졸업생 중에는 현재 대학교수가 2명, 시청 공무원 1명 등 다수가 사회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이들 수료자들이 모여서 동문회 결성 준비를 하고 있다. 이후 우암동의 지식인층이 두터워 동네가 정화되면서 새롭게 발전하고 있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맨위로가기

목록

만족도조사 ㅣ 현재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와 편의성에 만족하셨습니까?

  • 5점(매우만족)
  • 4점(만족)
  • 3점(보통)
  • 2점(불만)
  • 1점(매우불만)
등록하기
  • 담당부서 : 문화예술과 문화예술팀  
  • 담당자 : 최병욱
  • 전화번호 : 051-607-4063
open  출처표시 상업용금지 변경금지 공공누리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