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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막| 우암동

소막 소막은 일제시대 청진과 부산 두 곳에 있었다고 한다. 일제 때에 우리나라의 소들을 모아 군용으로 만주나 일본에 보내기 위해 검사를 거쳐야 되는데 소막은 전국에서 모아진 소들을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임시로 보관ㆍ관리하는 곳이다. 소막에서는 전국의 볏단을 모아 소들을 계속 먹일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으며 검역을 마친 소들은 육로로 기차를 타고 만주로 가거나 배를 타고 일본 시모노세키로 갔다. 그 당시 이곳 이출우 검역소에서 목부로 근무했던 정진석(1918년생) 씨는 소막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였다. 소막은 20개의 막사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한 개의 막사를 2칸으로 나누어 한쪽에 소 60마리씩 들어 있었다. 목부들이 10일간씩 체온을 재고 수의사들이 검역을 하여 아무 이상이 없으면 배에 승선하여 일본으로 가져갔다. 배는 일조함에 500마리, 평화함에 450마리를 실을 수 있었는데 1년에 12,000마리 정도를 실어 갔다. 소들의 경비 및 사료는 조선흥업회사에서 관리했다. 조선흥업회사의 한국인 대주주는 왕희곤 씨였다. 인부들은 1명당 60마리씩 관리하여 소 똥 치우기, 소독하기, 사료(콩, 미강, 여물, 소금, 마른풀) 주기 등을 하였다. 수의사들은 한국인은 1명만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일본인들이었으며, 목부들은 일본인 2명을 포함하여 20명이 있었는데 그때 같이 근무하였던 한국인 목부들은 모두 죽고 생존자는 정진석 씨 혼자뿐이라고 한다. 우암동 목부 20명 중 3병은 일본인이었다. 당시 일본인 목부는(나가다, 하라, 나가니시), 한국인 목부에는 우암동(김덕수, 장재택, 박수부, 최부기, 이응선, 김금선), 지겟골(김영식, 김금근, 김일찬), 석포(정석구, 김이진, 정몽국, 정윤갑, 정진석), 부전(무이덕), 용호(왕기필) 등이 일 하였으며 수의사는 대부분 일본인으로 금테 모자에 칼 차고 다녔다고 한다. 이 곳 소막에 들어온 소들은 수의사들의 검역을 통과해야 배에 실을 수 있었는데 우황병이 걸린 소는 죽여서 화장을 했다. 대개 6년생 이하의 건강한 젊은 소들이 들어왔으므로 병든 소는 기껏 1년에 15마리 정도였다. 이 때 수의사 모르게 목부들이 갈라 먹은 적도 있다고 한다. 또 가끔 새끼 밴 소가 들어와서 그곳에서 새끼를 낳으면 그 송아지는 목부들 몫으로 처리해 주었다고 하였다. 총 책임자는 일본인으로 현재의 장, 차관 급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 당시 현재의 문현4동 축협 자리에 도살장도 있었는데 늙은 소는 군량미를 하기 위해 잡아서 진해로 수송하였고, 농사짓는 소는 진주로 보내면 축산계에서 받았다고 한다. 또 이 검역소에서는 소뿐만 아니라 말도 검사를 하여 만주로 보냈다고 한다.1) 부친 한문치 씨가 지게골에서 주막을 하면서 소막도 여러 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 한용조(1939년 생) 씨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에서 일본인들이 가져온 소를 자신의 소막에서 몇 일씩 관리 사육하다가 만주로 보냈으며 어떤 때는 부친 한문치 씨가 함께 동승하여 가기도 했다고 한다. 한편 김주복 씨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에서 가져온 소가 아니라 진해 등 다른 우리나라 여러 지방에서 일본인들이 가져온 소를 우암동 소막에서 검역을 마친 후 만주, 일본 등지로 가져갔다고 한다.2) 1) 우암동 경로당에 계시는 할아버지 증언 2) 한용조 씨와 김주식 씨의 증언을 비교하면 일제시대 당시 소막으로 모이는 소의 국적 및 이동 경로에 견해가 달라 보인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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