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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민 수수소| 우암동

표민 수수소(漂民授受所) 용두산 주위에 ‘초량 왜관’1)이 있을 때 오늘날의 우암동에는 바다에서 표류하던 외국 사람들을 서로 인수인계하던 ‘표민수수소’가 있었다. ‘표민’이란 일본인이 일본 본토 또는 대마도 가까이 바다에서 항해를 하거나 고기를 잡다가 표류하여 조선 근해에 표착하거나 우리나라 선박들을 구조하여 준 사람을 말한다. 그러한 일본인을 표왜(漂倭)라고도 했는데 표왜 가운데 대마도 표왜는 표착 또는 구해진 자리에서 조선 관리의 검문을 받은 뒤 부산 왜관(초량 왜관)에 인계되었다. 그러나 그 표왜가 먹고 입는 식량과 옷감은 우리 동래부에서 규정에 따라 수령하였다. 대마도 이외에 일본의 딴 지역 출신 표왜 가운데 경상좌도 연안에 표착한 자가 있을 경우는 그곳 관리가 동래부에 알리고 동래부는 별차(別差:통역관)을 현지로 보내어 검문한 뒤 동래부의 우암포에 압송하여 표민 수수소에 수용하였다. 경상우도에 표왜가 있을 때는 거제에 있는 옥포만호 아래의 통역이 현지에 나가서 검문한 뒤에 다대포 첨사영까지 데리고 와서 인계하면 부산 왜관에 거류하는 일본인 통역이 다대포로 나와서 만나 본 뒤 그 표왜들을 해로를 거쳐 우암포로 인도 수용하였다. 그리고 전라도와 강원도 지방의 표왜에 대해서는 서울에서 문정관(問情官)을 보내어 검문하기도 하고, 그 도의 통역관이 검문한 뒤 동래의 우암포까지 압송하여 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수용하였다. 반면 우리나라 사람이 일본 근해나 대마도에 표도하였을 때는 대마도를 거쳐 왜관으로 오고, 왜관에서 우암포의 표민 수수소에 인계되었다. 그래서 그 당시는 우암포에 표민 수수소의 건물이 있었다. 1) 초량 왜관은 1678년(숙종4년)에 설치되어 1876년 개항 때까지 일본과 교역에 필요한 모든 업무를 관장하던 곳이었지만 문헌상의 기록으로만 전해질 뿐 유구는 그동안 발견되지 않았다 개항(1876년)이후에는 일본인 전관 거류지가 되었던 곳이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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