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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구어촌계변천사| 기타

남구어촌계변천사 이미지

남구는 바다를 접하고 있는 지리적 여건 때문에 포구를 중심으로 어업생활을 하여 왔다. 그런데 바다가 점차 매립되어 부두와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이제는 수려하였던 바닷가 해안의 정취는 이미 사라져버렸고 용호동을 제외한 대부분의 해안은 매립하여 현대화된 컨테이너 부두가 되어 버렸다.

용호동 섶자리 (현재 용호 선착장 부근)태생이며 부친이 어민으로 2대 용호 어촌계장을 역임한 박정석(1942년) 씨에 의하면 어민들은 해운대 미포에서 용호동 오륙도까지를 수영강이라 불렀다고 하다. 어민들이 이 지역의 바다생활에 대한 친밀감을 나타낸 말이라 생각한다. 이 지역 바다 밑에는 바위 가 많고 바다풀이 무성하여 고기가 많이 서식하였으나 11년 전 수영하수처리장을 건설할 때에 파낸 흙을 공해에 버리지 않고 가까운 근해에 버렸기 때문에 바위들이 모두 흙에 묻히면서 서식처를 잃게 되어 고기가 사라졌다고 한다.. 


현재 용호 어촌계장인 김선기(1952년 생) 씨에 따르면 용호동 염전이 있을 당시 태풍이 불때면 바다가 뒤집혀져서 백합 조개를 큰 그릇에 그냥 주워 담았고, 우럭도 손으로 잡았으며, 맹물과 바닷물이 접하는 지역에서는 큰 가오리를 많이 잡았다고 한다. 박정석 씨는 50~60년대 동산(東山) (섶자리 위에 있는 산)부근 200~300m 해안에서 노를 저어 주낚으로 광어와 돔, 삼치, 가오리, 우럭, 농어, 민어 등을 잡았으며, 섶자리 부근에는 해삼, 멍게, 성게, 고동 이외에도 물(바다풀)이 많아 게르치와 청술뱅이가 많았다고 했다. 또한 자연산 미역이 지천으로 많았으며 짤피가 많이 서식하여 이것을 상인들이 기계로 채취하여 채소처럼 단을 엮어서 판매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일제시대 때 섶자리에는 지금까지도 그 부근 제일 오래된 2층집 건물(약 100년)이 있는데 이 곳은 당시 일본인 호시노가 염전 앞 백합 양식장을 경영하면서 관리하던 건물로 골조는 수기목으로 지었으며 지붕은 함석이었다. 1층에는 관리 인부가 기거하고 있었고 2층 지붕 쪽에는 망대를 만들어 양식장의 관리에 이용하였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다대포에 거주한 고(故) 함용한 씨가 백합 양식장을 경영, 관리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염전 부근에는 소나무가 많았고 백사장이 바다 쪽으로 약 15m 정도 되었으며 물이 깨끗하여 해수욕장으로 사용하였으나, 1963년 8월 염전자리에 동국제강이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고기와 해조류가 사라졌다고 한다. 3대 어촌계장을 역임한 박임수(1948년생) 씨에 의하면 이기대 앞 바다에는 1969년에서 1998년 사이 140ha의 미역 양식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17~8명이 종사하였는데 이 지역 미역의 질이 좋아 일본인들이 높이 평가하였다. 


태종대와 청사포에 있는 가공 공장에서 부산시에 수출 면허를 가공하였는데 70%가 용호산으로, 1970년대 당시 대일 수산물 수출에 큰 몫을 담당할 정도로 많이 수출을 하였으나 남부하수처리장 방류 관로 공사(이기대 어장 앞 관통)로 미역 양식어장이 폐쇄(1990년 40억 정도의 피해보상을 받음)되었다고 하였다.. 부산시 수산협동조합 전무 김장우 씨는 1960년 용호동 해역 이기대에서 섶자리 부근, 백운포와 오륙도 부근에서 대형 갈치정치망 어장을 부친(감만동 거주 김병화씨)이 경영하였는데 부산에서 소비되는 전체 갈치 수요의 삼분의 이 정도는 담당하였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박정석 씨도 1958년부터 1963년에 이기대의 갈치 정치망1) 어장이 잘 될 때는 트럭으로 7~8대씩 수산 센터나 대전 등지로 반출하였다고 했다.. 김선기 씨는 현재 용호어촌계 마을 어장(동산 말에서 오륙도까지) 규모가 62.15ha라고 한다. 그러나 용호 지역 주변 바다는 생활 오폐수의 유입으로 인한 해양생태계의 환경파괴로 바다풀이 없어지고, 백화현상(사진)으로 고기들의 산란 장소가 상실되어 바다가 죽고 있으며, 부산 근해도 대부분 상황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1) 정치망은 어구를 오랫동안 한자리에 고정시키고 있으면서 어군이 들어가기 쉽고 함정에 들어가서 나가지 못하게 하여 잡는 어법. 


가. 어촌계의 조직 과정과 현황. 

어촌계는 보다 조직적이고 효율적인 어업을 위한 필요에 의하여 전국적으로 1962년 3월에 조직이 되었다고 박정석 씨는 말한다. 1965년부터 1985년까지 어촌계장을 역임한 박상수(1924년생) 씨의 말에 의하면 감만동 어촌계는 1965년 조합원 24명, 준조합원 20명으로 구성되었다. 포구는 전체 길이가 약 400m이며 모래사장의 폭이 20m 정도였으며, 선착장에는 0.8톤에서 2톤 규모의 범선 종류의 어선들이 30여 척이었다. 용호동도 어촌계조직이 필요하여 초대 어촌 계장인 고 김달문 씨(현재 어촌계장 김선기 씨 부친)가 주도하여 어촌계를 만들었다. 

당시 어촌계 기준 인원이 35명이었다고 하며 김달문씨가 어촌계 조직에 용호 지역 어민 이외에도 미역 양식업을 주로 하는 한산도, 거제도 등의 호남사람 14~5명을 유입 시켰다고 한다.. 김선기 씨에 따르면 현재 조합원의 요건은 어업에 연간 60일 이상 종사한 사람으로서 기본 출자금이 150원(평균 출자금)이며, 조합원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다. 조합원은 출자금의 최고 10%를 조합원 배당금으로 보장받으며, 조합장과 조합의 대의원 선출권이 있다. 현재 어촌계 조합원 수는 123명이라고 한다.. 

어촌계 친목 단체로는 부녀회와 청년회, 나잠회, 선주계가 있고, 부산시 수협 산하 어촌계는 23개 어촌계로 조직되어 있으며, 전국에는 1,775개 정도가 된다고 한다. 용호 어촌계 역대 계장으로는 1대 김달문 씨(제일오랫동안 역임)와 2대 김정석씨(10년), 3대 박인수 씨(4년) 4대 김선기 씨(3년 : 현재 어촌계장) 등이다. 어촌계장은 1988년까지는 임명제였으나 그 이후는 어촌계 조합원들이 직접 선거하여 계장을 선출하였다. 

행정 지도는 1995년 자치제 이전까지는 부산시 수산과에서 담당하였으나 이후 구청 지역경제과에서 담당하고 있다고 박인수 씨는 말한다. 또 부산시 수산협동조합에서는 어촌계 수산물을 처리하며, 어촌계와 연계하여 어구 구입과 면세유 기름 구입(시중가격의 이분의 일정도), 선박 보수지도, 대출융자, 피해 보산 산출 지원 등의 일을 하고, 1995년부터 매년 조합 소식지를 발행하고 있다고 한다. 수협에서 어촌계를 위해 하는 일은 어구 계통 구매와 기체 상환, 매립 보상 관계 지원(고문 변호사, 회계사 투입), 어획 판매(개인매매 허용) 등이며 현재 조합원 수는 3,600 여명이고, 1인 출자금은 150만원, 총 자산은 50억 정도라고 한다. 어촌계의 운영을 위한 어촌계 회관이 선착장 바로 뒤에 있다. 이 건물은 2층으로 건평은 40평이다. 지하는 창고로 이용하고, 1층은 조선소가 사용하고 있으며, 2층은 어촌계가 사무실로 사용한다.. 조선소에서는 어민들의 선박 건조와 외부 어선들의 보수 및 수리도하고 있으며, 과거의 목선에 비해 FRP 선박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관계로 목수들의 일감이 떨어졌고 목수의 대를 이을 사람이 없다고 한다.. 


나. 어촌계의 어업 변천과 활동. 

용호부두는 1989년 착공하여 1994년도에 완공하였고, 수심이 약 20m 정도이며 큰배를 두 척 정도 정박할 수 있으나 매립이 되면 용호부두도 없어지게 된다. 선착장의 어선은 1950년대 19척, 1960년대 35척, 1970년대 40여 척, 1980년대 60여 척, 1990년대와 현재는 100여 척이며, 현재 보상지역이기 때문에 신규 어업 허가는 동결되었다고 한다. 김선기 씨에 따르면 1950년대 이전에는 어업에 종사하는 세대가 10여세대 정도였고, 현재는 100여 척의 배가 있으며 70대에서 30대의 다양한 연령층의 어민들이 어업에 종사한다고 한다. 

어민들이 사용한 어구들을 살펴보면 용호 지역 연해에서 1950년대와 1960년 사이에는 정치망과 연승(연승은 여러 개의 낚시를 동시에 드리웠다가 차례로 들어 올려서 대상 생물을 잡는 어법 - 주낚)을 사용하여 갈치, 광어, 돔, 장어를 많이 잡았고, 1962년에서 1970년대에는 유자망2)으로 잡어와 장어 통발3)이 성행하였으며 , 1968년에서 1998년까지는 미역을 많이 양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고기잡이는 동력선으로 15~20노트 속도로 2시간 정도 나가서 조업을 하며 게르치, 깍다구, 우럭, 열기 등을 잡는다. 한편, 백운포 선착장에도 1960년에서 1980년도까지 15척의 배로 조업을 하며, 양식장 면허를 얻어 4ha의 미역을 양식하였으나 극동정유의 백운포 매립 허가로 양식 허가가 취소(보상받음)되고 선착장도 없어졌다. 

백운포에는 당시 주먹크기 정도의 까만 차돌 자갈이 400~500m 정도 바닥에 많이 깔려 있는 자갈마당이었다. 밀려오는 파도가 돌 자갈 위를 구르면서 마치 음악을 연주하듯 아름다운 선율의 자갈소리들이 60년대까지 섶자리까지 들렸다. 파도가 자갈 위를 구르는 소리가 크게 들리면 곧 태풍이 몰려온다는 신호이기 때문에 피해를 막기 위해 사전에 배들을 모두 안전한 곳으로 피항시킨다고 하였다. 근대의 어업 방법은 수심 20~30m 지점에 유자망을 설치하여 모래 부근에서는 도다리(넙치)를 잡고 바위 근처에서는 돔과 뽈락을 잡는다. 

정치망은 숭어를 주종으로 한치와 갈치, 방어를 잡고, 가을에는 전어와 흑돔을 잡으며, 연승 낚시로 붕장어, 열기, 깍다구, 우륵(과거는 뽈락)을 잡는다. 현재 어업 방법에 따라 종사하는 어민 수를 살펴보면 정치망 어업 25명, 유자망 어업 20명, 오징어 채낚시4)어업 25명, 문어 통발 어업 12명, 기타 양식업 등이다.. 

2) 유자망은 기다란 사각형 그물을 물의 흐름을 이용하여 그물코에 걸리거나 꽂히게 하여 잡는 어업.. 

3) 통발은 대상생물이 함정에 들어가서 나가지 못하게 하여 잡는 어법이다 어구 속에 미끼를 넣어서 대상생물을 유인하여 함정에 빠뜨린 뒤에 들어올려 잡는다. 

4) 채낚기 어업은 길다란 줄에 낚시를 매달고 낚시에 미끼를 꿰메어 낚시에 걸리게 하는 어법이다. 


1990년대 후반기부터 선박의 대형화와 고속화가 이루어지면서 어법, 어구도 발달되었다. 전통어업인 채낚기(외줄 낚시)어법에서 탈피하여 통발, 유자망, 정치망 등 업종이 다양화되었다. 그러나 문제점들도 많이 발생하였다. ERP 배들을 사용하므로 인해 목수들의 일감이 떨어지고, 석면 사용으로 환경 문제가 대두되었고, 연안에서 잡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저인망5)을 사용 하는 불법 어업으로 치어마저 고갈 상태이다. 

연안의 바다 밑에는 백화현상이 급속히 진행되어 바닥을 불가사리가 장악하여 고기가 거의 없어졌고 연승(주낚)인 경우 영역이 좁아져서 수심이 더 깊은 곳으로 가다보니 경비가 많이 든다. 예전에는 재수가 없다는 금기사항으로 여성이 뱃머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이제는 어획량 감소로 인한 경비 문제와 선원감소로 인한 일손 부족으로 여성의 역할이 커져서 어민의 90% 이상이 부부어민으로 조업을 함께 하고 있으며, 여성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큰 몫을 차지하는데 거의 절반의 일을 감당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부부가 함께 조업을 하다보니 자연히 가정의 자녀 교육 문제와 집안 관리상의 어려움이 발생하게 된다고 한다. 

유자망 어업의 하루 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새벽 3시경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1시간 30분 정도 나가면 어장에 도착한다. 어장에 도착하여 4시~5시경 어작업과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 인망(양망:그물을 끌어올리는 작업)작업을 한 후 5시~6시경 선착장에 도착한다 배를 내려서 여자는 좌판 판매를 하다가 귀가하고 남자는 뒷정리 후 귀가한다. 오후 1시경에 다시 선착장에 나와 그물 손질과 작업 준비를 하여 오후3시~4시경 투망하고 저녁 5시경에 귀가한다. 이렇게 하루를 부부가 함께 일을 하다보니 가정 관리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어획물이나 각종 수산물 처리는 80년도 이전에는 수산협동조합에 위탁 판매를 하였고, 1980년에서 1990년대 초까지는 충무동이나 남포동 자갈치 시장의 중개인에게 넘겼다. 현재는 선착장이나 횟집에 판매를 한다고 박정석 씨는 말하면서, 60년대에 섶자리 부근에 횟집이 11곳이 있었는데, 당시 남구 일대에서는 규모가 제일 크고 장사가 잘 되었는데, 이곳은 횟집앞바다 위에 손님 접대를 위한 시설을 마련하고, 손님들의 여흥을 위해 남원 등지에서 기예가 있는 기생을 2~3명씩 두었다고 한다. 손님은 주로 범일동 등지에서 많이 왔는데, 대선발효, 태화고무, 국제고무 등의 간부나 사장님 등 고급 손님들이 자가용을 타고 와서 이용을 하였다. 그러나 동국제강이 들어오면서 주변 환경이 오염되어, 횟집들은 회사에서 인수하여 모두 없어졌다. 그 후에 횟집이 다시 5~6군데가 생겨서 현재 영업을 하고 있다. 

예전에는 3년에 한번 정도 어촌계에서 무속인을 불러 하루 정도의 풍어제 행사를 하였는데, 먼저 “동산에 있는 각시당에서 행사를 하고, 다음은 선착장 앞에서 한다” 고 박정석씨와 김선기 씨는 말하였다. 최근에는 바다에 관한 많은 정보를 사전에 알 수 있기 때문에 풍어제를 거의 하지 않고 있으며, 개인적으로 필요에 따라 한다고 했다. . 

5) 저인망은 어구를 수평방향으로 임의 시간동안 끌어서 어류 등을 잡는 어법이다. 해저가 평탄하고 수심이 얕은 어로에서는 조업하기에 알맞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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