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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어,숭어,장어잡이| 기타

상어·숭어 ·장어잡이 가. 상어잡이 부산시 수산업 협동조합의 전무인 김장우 씨는 용당의 상어잡이가 최초의 전진기지였다고 한다.1930년 대말 용당 바다에 발동선이 등장했다. 이는 일본인 나까시마에 의한 것이었다. 용당인으로는 최장수 씨가 발동선을 소유했고 이어 일본인 가쯔기가 발동선으로 삼치잡이를 했다고 한다. 이러한 발동선의 등장으로 용당 어업은 연해 어업에서 연근해 어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0톤에서 40톤에 이르는 당시 대형 어선으로 불리던 이들 동력선은 상어잡이를 주로 하였다. 당시 상어고기의 주 소비지는 경상남북도이었으며 용당의 제사상에는 상어 산적이 올려져야 귀신이 응감을 했다고 할 정도로 상어 고기를 많이 먹었다. 부산 상어협회장이었던 박무영(1940년 생)씨는 상어고기는 주로 제수용과 혼수용으로 수요가 많았다. 특히 경상북도 안동에서는 헛제사밥에 반드시 사용하였는데 상어고기가 비린내가 없기 때문에 주로 사용하였으며 가격이 1kg당 23,000원 정도로 비싸서 부의척도로 생각할 정도였다고 한다. 상어잡이 어구는 대젓가락 굵기의 면사나 삼실을 꼬아서 사용하였다. 낚시는 강철로 된 큰 것으로 약 20m마다 한 개씩 매달았으며 어구 한 틀에는 약 30개의 낚시가 묶였다. 낚싯줄을 담는 상자는 대나무 살을 굵게 깎아 만든 사각형 광주리였으며 발동선 한 척에 10내지 12상자씩 싣고 다녔으며 줄을 모두 늘어놓으면 6,7킬로미터에 달했다고 한다. 상어 미끼는 민물 장어나 갯장어를 썼다. 민물 장어는 살결이 단단하고 비린내가 많아서 상어가 잘 잡혔으며 갯장어는 민물 장어만은 못했지만 가격이 쌌기 때문에 많이 썼다. 약 50년 전부터 상어잡이에 참여했다고 하는 최덕출(1920년 생) 씨에 따르면 용당 가까이에는 오륙도 부근에서도 상어가 많이 잡혔고 가덕도 부근에서도 많이 잡혔는데 선박 기술의 발달과 어획량의 감소로 먼 바다로 진출하게 되었다고 한다. 최씨가 참여하기 그 이전에는 배가 별로 많지 않았고, 상어잡이도 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최덕출 씨가 초등학교 3,4학년 시절에는 20ton 정도의 배가 22~23척 정도 있었으며, 제주도와 거문도 등지까지 가서 조업을 했다. 용당 사람 한 명이 배를 2척 내지 3척씩 가지고 있었으므로 선주는 10여명이 되었다고 한다. 상어잡이는 1년에 걸쳐 하였으나 정월부터 5월까지는 큰 재미가 없었고, 6월부터 여름에 많이 잡혔다고 한다. 잡은 상어의 크기는 큰 상어가 세발 이상 된 것도 있었다고 한다. 상어를 잡는 방법은 뜬 바리와 앉은 바리가 있는데, 주로 앉은 바리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뜬 바리는 48발에서 50발 정도의 길이를 물위에 띄워놓고 물이 흐르는데로 두기 때문에 훨씬 쉬운 방법이며, 앉은 바리는 물 밑에 앉혀 놓는 것을 말한다. 상어잡이의 미끼로는 민물장어나 큰 고동, 그리고 바다장어를 사용하였는데 민물장어가 가장 잘 잡혔다고 한다. 상어잡이 배들은 제주도와 대마도 근해까지, 동해로는 강원도 끝까지 바다를 헤치고 다녔다. 이렇게 번창하던 상어잡이는 1960년 이후 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되면서 사양길을 걷게 되었다. 마지막 부산상어협회장인 박무영 씨는 우리나라는 1930년경부터 상어잡이를 하였다고 했다. 1964년 15~25ton 규모의 배로 대마도, 욕지도, 근해 등에서 2~3일에 한배를 잡기도 했으나 1966년경 한 때 자원고갈로 상어가 없어 원해로 가기도 하며 오징어잡이도 하였다. 1968년도에는 세계 최초로 그물로 상어를 잡는 어법을 협회에서 공동으로 개발하여 멀리 공동구역인 북해도(외면어장)까지 진출하여 상어잡이를 하였다. 어망을 이용한 상어잡이는 상어가 있는 근처에 오후 5~6시경에 바다에 그물을 넣고 밤 11~12시에서 아침 7~8시까지 작업을 하였다(그물 무게 :8~9kg 정도). 전 부산시수산협동조합장인 황규철(상어잡이 배 9척 소유주) 씨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물로 상어를 잡는 방법 개발로 1972~3년경에 5·16 민족상까지 수상하였다. 세계의 상어 종류는 300여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귀상어(제일 고급어종), 한도상어, 청상어, 야지상어(지느러미 질이 제일 좋다), 악상어, 빔상어, 참상어 등을 주로 잡았다. 상어고기는 비린내가 나지 않기 때문에 제수, 혼수, 경조사에 많이 사용하였다. 최대 소비자는 주로 영남지방이며 특히, 경북 안동과 경주지방으로 상어고기 준비를 보고 부의 척도를 가늠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어묵에 상어고기를 넣어서 요리하는데 아교 성분이 쫄깃하고 연하기 때문에 주재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상어의 지느러미는 전량 가공업자에 의해 요리용으로 홍콩이나 싱가폴 등지에 수출하였고 일부는 국내 호텔에서 소비하였다. 협회에서 풍어제는 음력 1월에서 3월 사이에 남항 방파제와 영도 바닷가 등지에서 무당을 불러서 의식을 치렀고 진도에서까지 가서 풍어제를 하기도 했다. 1994년 UN의 해양법 발효로 인한 EEZ(배타적 경제수역 : 국가의 배타적 관할권이 미치는 200해리 이내의 경제수역으로 바다에 설정된 경제 경계선임) 설정으로 어장이 상실되고 UN의 보호어종으로 되면서 상어잡이는 사양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상어는 작은 치어가 있어야 하는 어종이며 회유성 어종이 조금 있으나 정착성 어종은 거의 멸종상태이다. 그래서 일본은 감척사업을 15년 전부터 실시하여 자원고갈을 방지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우리나라는 무계획적으로 허가를 남발하다가 갑자기 감척 사업을 실시하여 손해를 적정하게 보상받지도 못하였다고 한다. 박무영 선주의 마지막 조업은 1999년 7월 경진호(72ton)였는데 동지나해에서 3개월 조업하여 6,300만원의 수입1)을 올렸다. 2000년에는 상어잡이 배가 4척을 감척되면서 5월에 협회가 정리되었다. 마지막 배는 해영호인데 70ton 규모로 12~3명이 승선하여 조업을 할 수 있었던 상어잡이 배로 해체보상비 1억4천만원을 받고 해체되면서 상어잡이 배는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나. 숭어잡이 숭어잡이는 숭어가 떼를 지어 들어오게 되면 산 위에서 계림(름)2)보는 사람이 숭어 떼들의 동태를 살피다가 바다에 대기하고 있는 배에 신호를 한다. 김선기 씨에 의하면 바다에는 5, 6척의 배가 대기하고 있다가 신호에 따라 계름보는 사람을 중심으로 삼각대형으로 만들어 양쪽에서 그물로 숭어 떼를 둘러싸서 잡는다. 처음에는 일본인들이 신선대에서 숭어잡이를 하였다. 해방 후 가덕도, 거제도 등지에서 사람들이 모여 숭어잡이를 하였으나, 전문인이 아니라서 어군 형성이 안되어 잡지 못하였다. 용당 사람들은 기술도 없고, 어구도 없어 참여할 수 없었다. 처음엔 낚시로 하였으나 해방되고 20년쯤 지나자 큰 배가 그물로 뜨기 시작하여 낚시를 못하였다. 1) 박무영 선주에 의하면 상어잡이는 1회당 최소 1억원 이상은 되어야 수익이 된다고 하였다. 2) 계름(림)이란 해안에 있는 산 위에서 바다의 상태를 살피면서 어군이 있거나 지나가는 어목에 배들이 지키고 있다가 고기들을 잡을 수 있도록 고기망을 보는 것을 말한다. 다. 장어잡이 장어잡이는 숭어잡이의 미끼로 이용하기 위해 잡았으나, 그 뒤 어부들의 주된 일이 되었다. 낚시로 두 세 마리 잡다가 통발로 바꾸었는데, 이복기 씨에 의하면 70년대까지는 통발을 모르고 낚시로만 장어잡이를 했다고 한다. 어느날 대변(기장)의 배가 용당에 들어온 뒤부터 통발을 사용하게 되었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대변의 배가 돌아가지 못하고 용당에 들어왔는데, 통발을 사용한다고 하여 구경을 갔다. 그때 통발을 처음보고, 낚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장어를 많이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이전에는 목선으로 주낚을 하였는데 그때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장어를 많이 잡아서 어시장에 팔기도 하였으나, 현지에서 횟집이 생기면서 횟감으로 판매되었는데, 성할 때는 횟집이 20~30여 개나 생겼으며 현재까지 있는 다리집, 초가집 등이 유명하였다. 선창에는 파마를 하고 장구를 잘 치는 노는 사람이 있어서 회를 먹으러 오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잘 논다는 소문 때문에 멀리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이 당시에는 버스노선도 없었지만, 마차를 타고 범일동이나 서면 등지에서 왔다고 한다. 사라호 태풍으로 인해 용당이 황폐화되고, 동명목재가 들어오면서 바다가 매립되자, 용당에서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잡던 사람들은 타지로 가기도 하고 공장에도 다니는 등 용당 사람들의 생활이 변화되었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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