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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호 해녀들의 정착과정과 활동 노래| 기타

용호 해녀들의 정착과정과 활동 노래 이미지

용호 해녀들의 정착과정과 활동, 노래

 

섬 바깥으로 물질 나가는 일을 제주 해녀들은 ‘배꼇물질 나간다’ 또는 ‘물질 나간다’ 고 이른다. ‘배꼇물질’이란 ‘바깥물질’을 뜻한다. 물질 나가는 곳이 한반도인 경우라면 ‘육지물질’이라는 말을 흔히 쓴다. 

제주인들은 바다 건너 한반도를 흔히 ‘육지’라 하기 때문이다. 제주 해녀들의 이러한 바깥물질은 한반도 연안 곳곳에 이르지 않은 곳이 없다시피 했고, 일본 곳곳에 나가던 제주 해녀의 수효는 상당했으며, 중국의 칭따오(靑島)나 따리엔(大漣)까지, 멀리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까지 나갔었다.1) 

제주 해녀가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대거 경상남도 일대로 나가기 시작한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다. 그 이유의 하나로서 우뭇가사리 등 해조류의 효용도가 그 무렵부터 퍽 높아져 갔다는 사실도 들 수 있다. 그러자 부산 일대를 거점으로 한 해조류상인들이 점차 불어났다. 아울러 물질 나갈 해녀들을 모집하여 소개하는, 이른 바 객주들도 부쩍 늘어났으니, 이들은 늦겨울 제주로 몰려와서 바깥물질을 희망하는 해녀들과 접촉하여 적절한 조건으로 모집하곤 하였다. 


20세기 초 우선 무명옷이었던 해녀복이 고무옷으로 바뀌고, ‘족세눈’2)이 ‘왕눈’3)으로 바뀐다. 고무 해녀복이 등장하면서 고무모자·장갑·오리발도 같이 사용하게 되며, 잠수에 편하도록 허리에 납덩이를 매달게 된다. 채취물을 담는 망시리4)도 나일론으로 바뀌었으며, 망시리에 다는 테왁5)도박에서 스티로폼으로 바뀌었다. 20세기 해산물은 경제적 가치가 상승하고 급격히 해녀의 인구가 늘어난 것과 함께 이러한 새로운 어로도구(고무옷, 스치로폼테왁, 오리발 등)의 등장도 해녀의 육지출가를 조장한 배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른 바 ‘바깥물질’을 여기저기로 다녀오는 까닭은 더 나은 소득을 올리려는 데 있다. 고향 제주에는 어장이 한정되어 있고, 채취할 해산물도 무한량일 수 없다. 제주도 바깥에는 해산물이 풍부하게 있지만 이를 캘 해녀들이 없었다. 또한 고향을 훌훌 떠나서 살아보는, 말하자면 힘들 일상에서 해방되어 홀가분하게 약 반년쯤 지내어 보는게 크나큰 즐거움일 수 있고, 이른바 전도금을 미리 받아서 가계에 이바지한다던가, 목돈을 마련해 낼 수 있는 희열과 보람이 깔렸을 줄 안다. 



1) 제주도, 『제주의 해녀』1996. 

2) 안경모양의 수경 

3) 안경알이 하나인 수중안경으로 코까지 덮을 수 있게 만들어져 있으며, 길이 13cm, 폭 5cm이다. 양쪽에는 끈이 달려 있다. 

4) 길이 51cm, 폭 42cm의 그물자루이다. 위에는 채취 물을 집어 넣을 수 있도록 두 개의 둥근 대를 이용해 팽팽하게 살을 엮어 두었다. 밑부분은 그물로 묶어 두어 채취 물을 보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망시리와 테왁은 한 쌍으로 제주도에서는 시집을 가게 되면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새 망시리와 태왁을 선물하였다고 한다. 망시리와 태왁은 해녀의 상징이다. 

5) 망시리가 수면에 떠있을 수 있도록 매달아 둔 것이다. 길이 32cm의 둥근 모양이다. 망시리를 매달아 둘 뿐 아니라 수면에서 잠시 쉴 때 필요.



부산 일대에 물질 나가기 시작한 제주 해녀들은 멀리 청진에 이르기까지 점차 북상한다. 다도해 등 전라남도 연안과 황해도, 충청도 해안, 곧 한반도의 남해안과 서해안 일대까지 뻗쳐 갔다. 


용호동에 제주 해녀가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44년전인 1957년 고여학(용호1동 거주,23년생) 씨와 김임생(용호1동 거주, 33년생) 씨가 해남(海男)과 함께 물질 작업을 한 것이 시초가 된다. 제주 해녀들이 용호동 지역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당시 어촌계장이던 김달문 씨가 당시 일본으로 수출하던 천초와 우뭇가사리등을 채취하기 위해 해녀 17명, 현지인 해남 10명과 함께 작업을 하면서 부터였다. 고이선(용호1동 거주, 39년생, 해녀회 부회장)씨의 경우 당시 남편이 철도청 임시직으로 부산에 왔지만 생계가 곤란하여 16세부터 해운대 동백섬에서 작업을 조금씩 했으나, 기존 해녀들에 의해 작업을 할 수가 없어 자연산 돌미역과 천초, 우뭇가사리, 소라, 전복이 많은 용호동에서 상주 작업을 하였으며, 당시 시금치 밭이 많아 거름 냄새가 많았지만, 작업 물량이 많은 이곳에서 돈을 많이 벌겠다는 마음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당시 공무원 한달 봉급이 6천원 정도였으나, 고이선 씨의 경우 1만5천원 정도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요즘 해녀들이 하루 물질 작업 시간은 4시간 정도, 작업 구역은 용호동 섶자리에서 신선대 앞까지로 공동으로 바다에 들어가고 공동으로 나온다. 그리고, 그날 채취한 어획물은 각자가 대부분 오륙도 선착장에서 판매한다. 현재는 천초, 도박은 수질 오염으로 인하여 많이 없기도 하고 판로가 없어 작업량이 적고, 대신 요즘에는 파도가 심하고 태풍이 많이 불며 물살이 세기 때문에 자연산 미역이 많아졌다고 한다. 전복, 소라, 성게들이 많이 잡히며, 성게는 직접 일본으로 수출도 하고 그 외 수확물은 오륙도 선착장 방파제에서 판매한다. 그 수입은 짭짤하여 주위 주민들이 매우 부러워하기도 한다. 현재 용호동 어촌계 나잠업회에 등록된 해녀는 26명이고 비회원이 2명, 그 중에는 제주 출신이 아닌 다른 지역 해녀도 3명이 있다. 오륙도 선착장에 현대식 탈의장이 잘 갖추어 있어서 여기서 그날 작업을 의논하고 해녀노래를 부르기도 하며 일상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보와 친목을 나눈다. 해녀들이 부르는 특유의 해녀노래는 더욱 이색적이다. 물질하러 배를 타고 오갈 때에 탄 배의 노를 저으면서 역동적으로 부르는 해녀 노래는 제주 출신 해녀에 의해서만 제대로 불린다. 


해녀들은 노를 젓는 동작에 맞추어 해녀 노래를 생동감 넘치게 선·후창을 하거나 교창을 하며 구연했다. 해녀들은 해녀 노래를 힘차게 부를 때 일제히 규칙적인 동작으로 노를 저어 갈 수 있었고, 또한 사설내용에 도취된 채 스스로를 고무하며 격려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무엇보다 음악적 율동이 사설에 곁들어져 있기 때문에 해녀들은 노래를 흥겹게 부르며 노를 저어 가는 사이에, 노젓기가 한결 즐겁고 가벼워지며 해녀들의 건강하고 진실한 삶을 새로이 인식했다. 테왁, 망사리, 빗창6)등은 해녀작업의 도구로 이것들을 가지고 배에 오르는데, 이 때 테왁이나 빗창은 장단 치는 데 사용하기도 한다. 이제는 용호동의 해녀들도 해녀노래를 부르기는 하지만 극히 미미하다. 배를 타서 힘껏 노에서 물질 작업 준비하면서, 혹은 헤엄치고 육지로 돌아 오는 중 어느 누가 선창으로 부르면 다같이 따라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날도 오치선(나잠회 회장, 38년생,용호3동) 씨와 고이선, 고군자, 양도생, 고옥산, 윤순옥 씨 등 여러 해녀들이 옛날을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노래를 흥겹게 부르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6)전복 따는 도구로 길이 30cm, 너비 4cm 정도의 납작한 쇠붙이이며 끝이 칼날 같이 예리하고 납작한 날카로운 유선형이다. 



이여도사나 이여도 사나 이여도 사나 이여도 사나 힛 

혼착손에 빗창줴곡 혼착손에 테왁을 줴영 힛 

혼질두질 들어가보난 저승도가 분명하다 힛 

요넬젓고 어딜가리 진도나바당 혼골로가면 은과 금이 꼴렸던가 

우리어멍 날날적에 해천영업 데움서로 날낫 던가 힛 

이물에랑 이사공아 고물에랑 고사공아 힛 

우리야배 잼도재다 촘매새끼 노는 듯이 힛 

잘잘가는건 참나무배냐 솔솔가는건 소나무배냐 힛 

요네착을 심어사면 없는설움 절로난다 힛 

요년 덜아 혼모루만 젓어도라 앞서가게 힛 

우리배의 서낭님아 여끗드로 득달허게 허어줍서 힛 


후렴구 및 여음으로는 ‘이여도 사나’, ‘이어 싸’ 등의 말이 사용되고 잇다. 이 말들은 노를 젓는데 힘을 내기 위하여 내는 무의미 구음들로서 조율적, 휴식적인 역할을 하는 후렴구이다. 


이와 같은 해녀노래는 현지 거주하는 해녀들 중에서도 나이가 많은 해녀들만이 부를 수 있었고 젊은 해녀들은 후렴구를 같이 부르면서 흥을 돋구고 있었다. 또한 현지 주민들도 해녀 노래의 가사는 정확하게 모르지만 해녀들과 같이 후렴구를 부르면서 동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일제시대 선배 해녀들이 자랑스럽게 항일 투쟁하면서 불렀던 《제주 해녀의 노래(강관순 작사)》를 부르면서 갖은 어려움을 참고 강한 정신력으로 결속을 다지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제주 해녀의 노래(강관순 작사) 


1.

우리는 제주도의 가이없는 해녀들 

비참한 살림살이 세상이 아라 

추운날 더운날 비가오는 날에도 

저 바다의 물결에 시달리는 몸 


2. 

아침일찍 집을 떠나 밤이되면 돌아와 

우는 아이 젖먹이며 저녁밥 진다. 

하루종일 해봤으나 버는 것은 기막혀 

살자하니 한숨으로 잠못 이룬다. 


3. 

이른봄 고향산천 부모형제 이별하고 

온 가족 생명줄을 등에다 지고 

파도세고 무서운 저바다를 건너서 

조선각지 대마도로 돈벌이 간다. 


4. 

배움없는 우리해녀 가는 곳마다 

놈들이 착취기관 설치해 놓고 

우리들의 피와땀을 착취해간다. 

가이없는 우리해녀 어데로 갈까 


특히 이들은 해녀 공동으로 매년 음력 1월 보름날을 택일하여 음력 2월초에 오륙도 앞바다에서 해녀들만 참석한 풍어제를 올렸다. 또, 무사고 및 많은 수확을 얻기위해 개인적 ‘지드림’은 제주 해녀들이 새해 들어 처음으로 입어(入漁)하는 날에는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지(紙)를 물 속으로 던지면서 “용왕 할머니 지(紙) 바칩니다. 올해 무사태평하게 하여 주십시오.“, 일이 만사 형통하게 하여 주십시오.”하면서 치성을 드린다. 특히 제주 해녀들은 바다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용왕을 정성스레 섬기며 특히 바다에서 죽은 가족이 있을 때에는 이 ’지드림‘을 정성껏 드리며 한 달에 한번씩 ’지드림‘을 드렸다. 

이와 같은 용왕에 대한 ‘지드림’신앙은 용호동 해녀들에도 그대로 전파되어 바다에 작업을 나갈 때에는 몰래 ‘지드림’을 하면서 용왕에 치성을 드리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해녀들 가운데 천주교 신자들이 많아 개인적으로 치성을 한다고 한다. 


해녀들은 일년 사시사철 태풍이 부는 날을 제외하고는 쉬는 날이 거의 없다. 몸이 피곤하고 아파도 바다에 나가 작업을 하다보면 자연적으로 병이 낫는다고 믿으면서 즐겁게 작업한다. 물질의 고통을 이기려고 뇌선과 사리돈 등과 같은 약은 항시 복용하는 중독 현상을 가지고 있다. 복용을 않고 물에 들어갔을 때 머리가 아프고, 귀가 당긴다고 한다. 이런 억척스러움과 강한 생활력으로 다른 주민들보다 잘 살게 되어 자부심을 갖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결속력이 대단하다. 나잠업 회원들 길흉사 시에는 일체 작업을 중단하고 모든 회원가족이 그 집에 가서 길흉사가 마칠 때까지 도와준다고 한다. 기제사 때에도 부조를 하고 도와주는 보기 드문 상부상조를 통한 결속력을 볼 수가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이들 해녀 중 제일 나이가 젊은 해녀가 양도생(50년생, 용호1동, 나잠회 총무) 씨이며, 현재 해녀들의 고령화로 인하여 점차 해녀수가 줄어들고 있으나 대를 이을 젊은 해녀가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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