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을 사랑한 위트컴 장군| 기타
부산을 사랑한 위트컴 장군
부산역 앞 대화재 복구 등 전후 재건사업 주도
메리놀병원 부산대학교 신축 지원에 적극 나서
추모사업회 발족 … 다큐멘터리 제작 업적 기려
고 리처드 위트컴(Richards. Whitcomb, 1894∼1982) 장군은 부산 미군 군수기지 사령관(준장)을 역임하고 지난 82년 영면, UN기념공원에 안장된 유일한 장군이다.
장군은 1894년 미국 캔자스시티에서 태어나 ROTC출신으로 1916년 미군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밴플리트 장군과 함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 제1무공 훈장을 받았다.
1952년 한국 전쟁 때는 부산 미2군수기지 사련관(준장)으로 복무했으며 1982년 오전11시 미8군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운명을 달리 한 후 7월20일 오전10시 UN기념공원에 안장됐다. 1953년 7월 6·25전쟁 휴전 이후 전후복구를 위한 대한 미군 원조처(AFAK)프로그램이 시작됐다.
1953년 11월27일 부산역 앞 대화재가 발생하면서 위트컴 장군은 191개 대한 미군 원조처(AFAK)사업을 진행하면서 화재복구를 위해 한미재단으로부터 15,000달러의 지원을 받아냈다. 메리놀병원, 침례병원, 성분도병원, 복음병원, 독일적십자병원 등 병원건립과 이재민 후생 주택건립(영도208동, 동래210동 등), 보육원과 요양원건립, 국제시장과 메리놀병원 주변도로 개설 등 많은 일을 했다.
그러던 중 미국의회 청문회에 불려가 의원들을 대상으로 "전쟁은 총, 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말해 기립박수를 받았고 많은 구호물까지도 받아 부산으로 돌아온 일화는 유명하다.
장군은 현 카톨릭센터 자리에 메리놀수녀회가 운영하던 메리놀의원이 병원부지를 매입해 병원을 세울 수 있도록 적극 도왔다. 병원 건립자금이 모자라자 휘하 미군 장변들에게 월급 1%를 공사비에 지원토록 조치했다. 은퇴수녀인 요한나 수녀,마가렛수녀는 지난 1962년 11월 완공된 중구 대청동 메리놀병원의 원래 이름은 `주한 미군기념 메리놀 수녀병원이라고 증언했다.
장군은 또 "부산대학교 신축을 위해 대한미군원조처(AFAK)자금에서 25만 달러에 해당되는 자재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하고 조속한 마무리를 위해 발을 벗고 나섰다.
윤인구 총장이 전일본인소유 다카세(高瀨)농장일대를 대학부지로 지목하자 장군은 이 일대를 답사한 뒤 이승만 대통령과 경상남도 도지사를 설득, 농림부의 국유지로 전환한 뒤 다시 문교부 소관으로 이전해 부산대학교 부지를 무상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와 함께 공병대를 동원하여 동래 온천장에서 부산대학교까지 도로를 개통시켜주었다. 장군의 이러한 부산 사랑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지기 시작했다.
1953년 11월27일 부산역 앞 대화재로 인해 구제 받은 시민들이 선행에 보답하고자 1954년(단기 4287년) 11월에 공덕비에 "위트컴 장군은 우리들 화재민을 위하여 이곳에 학교, 조산원, 교회를 짓도록 후원하여 주었다. 우리들은 영원히 그 공적을 찬양하는 바이다"는 글을 새겨 세웠는데 이 공덕비가 없어져서 부인인 한묘숙 여사는 안타까워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위트컴 장군을 기념하는 추모사업회가 발족하고 그에 대해 재평가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부산대학교에서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장군을 기리고 (사)스토리텔링협의회에서는 뮤지컬로 제작해 관광상품화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