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행정구역

home 남구소개 > 우리구소개 > 행정구역
  • facebook
  • twitter
  • print

대연동

대연동 역사

대연동(大淵洞)의 지역적 위치를 살펴보면 남구에서 그 넓이가 가장 큰 동으로 남구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남천동과 광안동에 접해 있고, 서쪽은 문현동, 남쪽은 우암동, 감만동, 용당동, 용호동과 접하고 북쪽은 황령산을 경계로 하여 연제구와 접하고 있다.

대연동은 황령산이 좌청룡 우백호의 형세로 양쪽을 감싸주고 있다. 동쪽의 포등(浦燈: 갯등 지금의 부경대학교 대연교정 남쪽에 있었던 언덕)과 서쪽의 천제등(天際燈 : 지금의 부산공업고교 뒷산), 호곡등(戶谷燈 : 지게골)이 담장 역할을 하고 있으며 남쪽은 전선등(戰船燈 : 부산외국어대학교 뒷산 일대), 평지등(平地燈 : 지금UN묘지 뒤편), 비사등(飛蛇燈 : 지금의 박물관북편) , 반개등(半開燈 : 지금의 대연1동 남쪽부근의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황령산이 병풍처럼 가려 주고 있어 명실상부한 배산임해의 지형을 이룬다.

대연동의 지명변천을 살펴보면 조선후기(1547년)에는 동래부 남촌면 대연리로, 1902년에는 동래부 남촌면을 동래부 남하면 대연리로 분할하여 5개동을, 1910년에 다시 남하면을 용주면으로 재칭하였고 일제시대인 1914년에는 동래부 용주면 대일리(大一里)와 대이리(大二里)로 구분되었다가, 1940년대 동래부 남촌면 대연리(大淵里)로 복귀하였으며, 해방 이후 대연동으로 명명되었고 그후 6개동으로 분동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연 1동은 대연동의 본동으로 남쪽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데, 수영로를 중심으로 도로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곳은 산과 바다를 접하지 않고 평지로 형성된 지역으로 옛날에는 못물을 이용하여 농사를 지었던 지역인데 오늘날에는 토지구획사업으로 평지의 주택지가 되었다.

대연 2동은 대연동에서 서남단에 위치하고 있는데, 동남쪽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지겟골 고개(현 대연고개)에 접하고 있다. 박본홍(1930년 생)씨에 의하면 옛날 지겟골 고개는 아주 높은 고개였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현재 못골시장 앞 도로가 큰 길이었으나 경사가 매우 심하였다. 일제는 이 지겟골 고개를 낮추기 위해 징용자들을 동원하여 흙을 돋우고 파내는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징용자들은 2인 1조가 되어 고개 흙을 파내었고, 레일을 깔아 밀어 올리며 고개를 낮추는 작업을 하였으나 완성을 하지는 못하였다. 그후 1965년부터 부산시에서 3차에 걸친 착평공사를 하여 오늘날의 주요 교통도로인 대연고개가 되었다.

대연3동은 대연동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남구에서도 가장 면적이 넓은 지역이다. 이곳은 동쪽에 바다를 두고 남쪽은 용호동과 용당동을 바라 보며, 북쪽으로 황령산의 줄기인 관모봉이 솟아 있어 북고남저의 지세이다. 황령산에서 발원한 남천(南川)이 대연 3동을 지나서 바다로 들어간다. 산지가 차지하는 비율이 상당히 많아서 도시에서 보기 드물게 낙농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이곳에는 자연마을인 사분포 마을(사분개)과 용소마을이 있었고, 근대화 이후 형성된 낙농마을이 있었다.

대연 4동은 대연동의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당곡(當谷)마을을 중심으로 동쪽과 북쪽은 열려있으며, 서쪽과 남쪽은 고갯마루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동쪽에는 천혜의 명당인 UN묘지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는 옛날 자연마을인 석포(石浦)마을(돌개)과 당곡(當谷)마을이 있었다. 대연 5동은 대연동에서 북쪽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북쪽으로 황령산의 줄기인 연주봉과 바람고개에 가려 있다. 산줄기가 양쪽팔로 감싸안은 듯이 좌청룡 우백호의 형세로 아늑한 분지를 이루며 북고남저의 형세인데, 절반 정도가 북쪽의 산지로 되어있다. 이곳에는 옛날 자연마을인 못골마을이 있었다.

대연6동은 대연동에서 서쪽 북단에 위치하고 있는데, 황령산의 남쪽 줄기가 뻗어 있는 산등성이에 위치한 지역이다. 현재 남구청과 남구보건소가 위치하고 있는데 평지가 적고 거의 산지로 고지대 주거지역으로 형성되어 있다.

주민센터
대연동 주민센터 안내표 : 행정동, 주민센터, 연락처, 홈페이지로 구성된 표
행정동 주민센터 연락처 홈페이지
대연1동 우)48504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평화로 24 Tel : 051)607-4801 홈페이지
Fax : 051)607-6619
대연3동 우)48432 부산광역시 남구 수영로 345 (대연동, 대연힐스테이트푸르지오 상가동 1층118호, 2층 216호) Tel : 051)607-4803 홈페이지
Fax : 051)607-6659
대연4동 우)48485 부산광역시 남구 석포로91번길 96 Tel : 051)607-4804 홈페이지
Fax : 051)607-6679
대연5동 우)48437 부산광역시 남구 진남로46번길 7 Tel : 051)607-4805 홈페이지
Fax : 051)607-6699
대연6동 우)48453 부산광역시 남구 수영로 155 Tel : 051)607-4806 홈페이지
Fax : 051)607-6719
동이름 유래

오랜 옛날부터 황령산 골짜기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큰 못이 여러곳에 있었다. 이 못의 지(地또는 淵)와 골짜기의 곡(谷)에서 연유되어 지곡(池谷), 일명 ‘못골’이라고도 부르던 것이 한자로 표기되면서 크다는 의미의 대(大)와 못이라는 뜻의 연(淵)을 합하여 지금의 ‘대연동’ (大淵洞)으로 정착되었다. 옛날 이 지역은 황령산의 남쪽에서 동쪽으로 지형의 경사도가 높아서 비가 오면 그 물길이 골짜기를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된 못에 모이게 되었다. 이 일대에는 세개의 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지금의 대연초등학교 부근에 있었던 아랫 못, 현재 중앙고와 대연여중 입구 일대의 고동골 작은못, 1930년 수리조합법에 의하여 일제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현재 부산예술대학과 동천고 일대의 윗못이 있었다. 박본홍 씨에 의하면 현 대연초등학교 부근의 아랫못(신라시대에 축조된 못)둑은 길이 120~130m에 높이 20m(수심 2m)정도로 추정된다.

LG메트로시티 입구에서 유엔묘지 위 도로와 부산공고까지도 옛날에는 모두 논이었는데, 못 둑의 수문(못종)을 개폐하여 전체 논에 필요한 물의 양을 조절했었다. 그 골짜기의 못(현 대연 5동 대연초등학교 일대에 있었음)을 『동래부지』는 제언을 밝힌 자리에 “생천언이라 하여 동래부의 남쪽 20리에 있는데 길이가 181척, 넓이가 125척”이라 기록하고 있다. 『동래부읍지』는 “생천언이 동래부에서 남쪽 20리에 있는데 둘레가 373척, 깊이가 6척 5촌”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못이 상당히 넓고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작은 못은 큰 못의 아래 동쪽 (현 대연 5동)과 현 대연여중 자리에도 있었는데, 이 곳에서 아이들은 수영을 배우고, 아낙네들은 빨래를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69년 말에서 70년대 초에 ‘토지구획 정리조합’에 의해 수리조합사무소에서 ‘수리 조합법’에 의거하여 못을 매립시켰던 것으로 기억된다.

‘수리조합’은 아마도 농지를 가진 사람이 못을 매립해서 농지화하기 위해 시작된 것으로 여겨지며 구획정리를 통해 못을 포함시켜 분배하여 매매하였다. 대연정보고등학교(구 대연정보여고)쪽은 ‘대연동 북구 구획조합’, 대연여자중학교 쪽은 ‘문현동 토지구획조합’, 유엔묘지 쪽은 ‘대연동 남구 구획조합’으로 정리하여 못이 농지화되고 다시 택지화되면서 급진적으로 도시화 된 것이다.

일제시대인 1930년(경오년)에 일제가 수리조합을 만들고 옛날의 못자리 위쪽에 제방을 쌓아 다시 새로운 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즉 지금의 대연5동의 북쪽 골짜기(현 부산예술대학과 동천고 부근)에 또 하나의 큰 못을 축조하였다는 것이다. 해방 후 미군들이 이 못에서 수영을 하다가 사망했을 때는 시신을 인양하기 위하여 자동차의 전조등을 켜놓고 밤새 시신을 찾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못도 남구 토지구획 정리계획에 의하여 메워지고 아파트 등 주택단지로 변하여 못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못골’이란 이름만 남아 전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못(현 해연중 입구에서 중앙고등학교 일대)은 고동골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골짜기의 물을 모아서 인근의 마을에 공급하여 종사를 짓게 하였다고 한다. 옛 부산공고 자리 주변엔 해방 후 ‘미 5공군 사령부’가 주둔해서 수영 비행장과 연결되었고, 부경대학교 용당캠퍼스 뒷산 정상 쪽엔 ‘항공학교’부지가 확보되어 있었는데. 그 곳은 미군이 통신대로 활용하였다. 이제는 그 당시의 옛스러운 정경을 찾을 수는 없지만 대연동은 지형적 특성으로 못의 물을 이용하여 타 지역보다 넓은 농토(당시 못골 논밭의 면적이 약 495,000㎡(15만평)되었다고 한다)에서 논밭을 경작하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연동의 변천과정

대연동의 마을 형성과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동국여지승람』의 동래현 고적조(古適朝)의 기록에 “동래현에는 속현인 동평현 이외에 네개의 부곡과 한 개의 향이 있었다” 고 하며, 또 다른 자료에는 지금 고찰하여 보건대 ‘신라가 주군을 만들 때에 그 전정이나 호구가 현이 될 만하지 못한 곳에는 향(鄕) 또는 부곡(部曲)을 설치하여 소재 읍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 때에는 소(沼)라고 칭하는 마을 단위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동래현 기록 자료를 보면 “ 동평현은 동래현의 남쪽 20리에 있는데, 고지도(古?島) 부곡은 현의 남쪽 30리에, 조정(調井)부곡은 현의 북쪽 20리에, 형변(兄邊)부곡은 현의 남쪽 해안에 있는데 신라 때에는 남해신(南海神)을 모셨으며, 부산(富山)부곡은 부산포(釜山浦)이며, 생천향(生川鄕)은 현의 남쪽 20리에 있다”고 했다. 위의 기록에서 향과 부곡은 이미 신라시대부터 있어 왔으며, 전정이나 호구가 적어 현으로 만들 수 없는 곳에 설치하였다는 것, 또 이것은 소, 장, 처와 더불어 고려의 군현제도의 일반행정 구역에 포함되지 않은 특수한 지역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자료에서 동래현에 소속된 이들 향과 부곡이 어디쯤에 있었는가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거리표시가 되어 있지만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고, 이 지역중에서 형변(兄邊)부곡과 생천향(生川鄕)을 지금의 남구 지역으로, 생천향(生川鄕)을 현재의 대연동 지역으로 보고 있다.

『동래부지』제언조에 “생천언은 부의 남쪽 20리 거리에 있는데, 길이가 1백 80척, 너비가 1백 25척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생천향(生川鄕)은 생천언이 있었던 대연동의 못골 부근이며 지금도 이곳을 ‘못골’이라 하는데 이것은 생천언의 명칭이 못골로 바뀐 것으로 사료된다. 이상의 자료에서 대연동은 신라시대 때 생천향(生川鄕)이란 행정구역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 당시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큰 못이 있었는지, 어떤 씨족들이 살았는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대연동에 가장 먼저 들어온 씨족은 못골 마을에 죽산 박씨가 약 600년 전부터 경기도에서 화를 피하기 위해 이주하여 왔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후 석포(石浦)마을에는 동래 정씨, 용소(龍沼)마을에는 금산 김씨. 당곡(堂谷)마을에는 남평 문씨, 달성 서씨들이 집단으로 씨족 마을을 이루며 살아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금산 김씨의 후손 가운데 학자가 배출되어 자료가 남아 있었으나 당시 교사였던 신동엽씨가 한국의 역사에 대한 연구를 하나라 자료를 모아 연구하던 중 문교부 국사 편수관으로 발탁되어 가면서 족보 등 모든 문서를 들고 가버렸다.

그 후 신교사가 6.25때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되면서 대연동의 역사적 자료도 묻혀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또한 어느 집에 호적이 하나 남아 있었는데 자료의 중요성을 모르고 있던 후손들에 의해 벽지로 쓰이고 말았다고 한다.

8.15 해방 당시의 대연동 규모를 마을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못골 마을에는 죽산 박씨가 50호 정도로 제일 많이 살았고, 여은 송씨 10여 호, 김해 김씨 10여 호, 밀양 박씨 10여 호, 기타 20여 호 등 모두100여 호가 모여 살았다고 한다. 석포(石浦) 마을에는 오래 전부터 동래 정씨가 옮겨와 살았다. 1530년 경에 동래서 수문장 정복덕 씨의 아들인 정춘세 씨가 동래에서 수영을 거쳐 용소(龍沼)마을로 이주해 와서 살았다 한다. 그후로 이곳에는 경주 김씨. 유씨 등이 해방 전까지 50여호 살았다고 한다.

용소(龍沼)마을에는 약 500년 전부터 경주 이씨 20여 호, 380년 전에 창녕 영산에서 이주해 온 금산 김씨 30여 호가 살았으며, 그 밖에 김씨 10여 호, 남평 문씨 10여호, 금녕 김씨와 기타 성씨 약 50여 호가 해방 전까지 이곳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당곡(堂谷)마을에는 남평 문씨와 경주 최씨가 이주해 와서 살았다. 해방 당시에는 남평 문씨가 15호, 경주 최씨가 10여 호, 달성 서씨가 10여 호, 모두 40호 정도가 살았었다고 한다. 그후 1964년에 부산시 토지구획 정리사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대연동은 부산시의 변두리 농촌지역에 지나지 않았다. 그 당시 이 지역에 거주했던 호수를 보면 못골에 50여 호, 석포(石浦)에 30호, 당곡(堂谷)마을에 20호, 용소(龍沼)마을에 30호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 마을은 자연마을로 형성되었고 대부분이 농사를 지었으며 어업 및 이웃의 염전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약간 있었다.

문화체육과 문화관광팀 : 051-607-4062

만족도조사 ㅣ 현재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와 편의성에 만족하셨습니까?

  • 5점(매우만족)
  • 4점(만족)
  • 3점(보통)
  • 2점(불만)
  • 1점(매우불만)

등록하기

  • 담당부서 : 총무과 자치행정팀  
  • 담당자 : 박민수
  • 전화번호 : 051-607-4112